[ 오르고의 횡설수설 10 ] 가장 아름다운 단어
보스톤코리아  2020-03-30, 11:07:01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를 끈다. 특히 그것이 아는 사람이거나 유명인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한 때 웃음 박사로 한국에서 꽤나 유명했던 황수관 박사의 이야기다. 우연히 돌린 텔레비전 채널에서 그분이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 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에 관한 것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아무튼 그분 가족은 히로시마 근처에 살았다. 어느 날 폭탄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빨리 따라오라며 만삭인 어머니와 4살, 2살 어린아이를 뒤에 남긴 채 홀로 도망을 갔다. 다시는 가족을 버리지 않겠다고 아버지는 통렬히 반성했다. 가족은 귀국을 했고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피란길에 올랐다. 포탄이 떨어지자 엄마는 몸을 던져 아이들을 품었지만 아버지는 혼자 도랑 속에 몸을 숨겼다. 몸이 약했던 황 박사가 홍역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자 아버지는 아이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있었지만,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자신의 입으로 얼굴의 고름을 닦아냈다. 이야기를 하던 황수관 박사도, 같이 나온 패널들도, 프로그램을 보던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아직도 그 프로그램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란 제목을 단 프로그램이었다. 

세계 백여 개국의 4만 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꼽힌 단어가 바로 ‘엄마’였다고 한다. 그러니 나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보다 훨씬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엄마가 없고서야 내가 존재할 수 없으니까. ‘엄마’라는 단어는 차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포근함, 아련함, 평안, 안심, 그리움을 내포한다. 우리에게 엄마는 모든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버지도 있기는 하다. 가시고기란 물고기 말이다. 알을 낳은 후 미련 없이 사라진 어미를 대신하여 아비는 그때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알을 책임진다. 침입자로부터 알을 지키고,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지느러미로 끝없이 부채질을 하며, 알이 부화하면 둥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보호하다가 자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나면 기력이 다한 아비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슬프게도 이런 부성애는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에게만 있나보다.

나의 엄마는 이제 아흔이시다. 살아계시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큰 병 없이 복지관에 매일 출퇴근 하시는 것이 고맙고, 전화할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받아주시는 어머니가 나는 너무나 고맙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90이시라는 말을 할 때 잠깐 나는 객관적이 된다. 아, 내 어머니도 이제는 정말 노인이시구나. 동생이 가끔 보내주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 이제는 영락없는 호호 할머니이시다. 그런 엄마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무거워지고 서글픔이 엄습한다. 멀리서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이 그저 그리워하기만 하는 내 처지가 한스러워 슬픔이 배가된다. 그렇지만 전화를 할 땐 본능적으로 그냥 엄마가 되신다. 나의 응석을 받아주시고, 언제나 내 안위를 걱정해주시는 한결같은 엄마로 돌아오신다. 

나에게 엄마는 나이가 없는 존재이시다. 50이었을 때도, 70이었을 때도, 80이었을 때도, 그리고 90이 되신 지금도 엄마는 언제나 내 기억속의 첫 번째 이미지에 멈춰계신다. 그건 아마도 40대 때의 엄마가 아닌가 싶다. 멀고 먼 8천마일 태평양을 건너 수화기에서 전해지는 엄마의 잔소리들, 밥 굶지 말고 다녀라, 운전 조심해라. 한 때는 잔소리로만 여겨졌던 귀에 익은 엄마의 변함없는 레퍼토리. 이제 나는 엄마의 ‘잔소리’가 그리운 나이가 되었다. 나 역시도 엄마에게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안부 전화를 한다. 엄마, 식사 거르지 마세요, 천천히 다니세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세요. 오늘도 나는 그리운 잔소리를 주고받으려는 기대감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orugo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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