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음악의 길, 변화경 교수 인터뷰
보스톤코리아  2011-04-11, 17:23:03 
열악한 상황을 딛고 40여 년 음악에 열정을 쏟아온 NEC의 변화경 교수
열악한 상황을 딛고 40여 년 음악에 열정을 쏟아온 NEC의 변화경 교수
(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 김현천 기자 = NEC(New Englaland Conservatory)의 최초 한인 피아노 교수이자 거장 피아니스트 러셸 셔먼의 아내로 알려진 변화경 교수(1947년 생)는 요즘 지역 한인들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생명이 다하기 전에 “소외된 사람, 지구촌 속에서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변 교수의 마지막 삶의 여정을 엿볼 수 있다.

“내 평생 받은 것을 다 돌려주고 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소원이 없다”고 말하는 변 교수. 그녀는 가슴 뜨겁게 삶을 부둥켜 안고 살아왔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 지혜로운 부모님
변 교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부모님으로 꼽았다. 6.25 를 겪고 난 후 가난에 치이던 어린 시절, 아버님의 직장이 학교라서 학교 사택에 살던 그 시절에 오로지 마음을 쏟을 수 있던 것은 학교에 있는 피아노였다.

당시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마음 먹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변 교수는 아침에 악보를 외우고, 수업이 다 끝난 밤에 달빛을 전등 삼아 피아노를 연습했다.

겨울 방학이면,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교실에 숯불을 담은 깡통을 들고 가 언 손을 녹여 가며 피아노를 치던 당시를 회상하는 변 교수는 “깜깜한 밤중에 나를 데리러 온 어머니는 나를 안고 불쌍하다며 우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괜한 감정이 북받쳐 어머니를 끌어 안고 함께 울었다”고 말했다.

“나의 부모님들은 한번도 나에게 강압적으로 뭔가를 시킨 적이 없다. 나는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끊임 없이 무언가를 갈구했다. 내 안에는 늘 호기심이 끊이질 않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내 부모님이다”라고 밝혔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키워나간 꿈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변 교수는 전쟁을 겪은 후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공부뿐 아니라 음악, 미술, 문예 방면의 활동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 지인으로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충고를 듣고 피아노를 택했다. “다른 것은 다 놓을 수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음대 진학을 결정한 변 교수는 주말마다 통일호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당시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1시간이었다. 그러나 변 교수는“나는 11시간 기차를 타고 오가며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자연으로부터 받은 감성들이 나의 마음의 밭을 일구어 주었다”고 말하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모든 가능성에 최대한 마음의 창을 열어야 그게 모두 자기 자신에게 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서울대 음대에서 유학의 결심
변 교수는 결국 서울대 음대에 합격했고, 연세대에 재학중인 오빠와 신촌에서 자취를 했다. 을지로 6가에 자리하고 있었던 서울대 음대까지 버스로 통학을 하며 살림을 하느라 같은 과 친구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손이 부르트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서럽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더 불태웠다. 나는 그 아이들보다 월등히 잘 되고야 말겠다는, 속 밑바닥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는 변 교수는 곧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됐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유학을 위한 학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 그러나 난관
변 교수가 뉴욕에 떨어진 것은 1970년. 모은 돈 3,000불을 이리저리 짐 속에 숨겨 들어왔으나 돈을 아끼느라 궁색한 생활을 지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서 추천 받은 선생들은 모두 레슨을 받아보니 탐탁치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울대 교수 자리도 약속이 돼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줄 스승을 찾지 못한 상심이 컸다. 마음을 달랠 길 없던 변 교수는 카네기 홀 주변을 헤매던 중 록 펠러 센터의 천사 조각상들이 “깨어라”고 말하는 듯한 환상을 봤다. 이에 러셸 셔먼을 찾기로 결심하고 보스톤행을 택했다.

기이한 스승과의 만남
오디션을 통과하고 러셸 셔먼의 제자가 된 변 교수는 가장 자신만만한 곡을 들고 러셸에게로 갔다.
“연주가 다 끝나자 러셸은 칭찬이나 수업에 관계된 가르침 대신 이상한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잘못 찾아 왔다는 생각에 상심이 돼 석양 속에 서서 두 시간 동안 고민했다”는 것이 당시를 떠올리며 변 고수가 한 말이다.

그러나 ‘두달만 레슨을 받아보자’고 스스로를 타이른 변 교수는 서서히 러셸의 레슨에 놀라기 시작했고, 눈이 떠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혜성과 같이 나타난 신인 피아니스트” 등 한국에서 듣던 찬사로 인해 팽배해 있던 자신감이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변 교수는 이때부터 남들보다 두배 더 많은 시간을 연습에 매달렸다. 하루에 13시간씩 연습하면서 유학을 지속하기 위해 생활비를 아껴야 했다. 결국 핫도그 한 개로 하루를 나기 시작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눈앞이 팽팽 돌았다. 그러나 돈 많은 애들이 부럽지 않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최고가 될 것이라는 꿈이 늘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화경 교수의 남편이자 피아노의 거장 러셸 셔먼
변화경 교수의 남편이자 피아노의 거장 러셸 셔먼
 러셸 셔먼과 사랑, 결혼
러셸은 크리스마스에 코트를 선물해줬다. 당시 돈이 없어 코트를 사지 못하고 얇은 옷을 입고 다니던 제자를 본 러셸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지 못했던 것. 두 사람은 그림과 문학에 대한 대화를 하며 더욱 더 가까워 졌고, 마침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러셸은 자신을 가리켜 ‘힘든 사람’이라며 결혼을 마다했다. 변 교수는 한국을 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와 러셸과의 사랑 사이에서 밤새 피아노를 치며 고민을 했다. 지극히 한국적인 결혼 정서를 갖고 있던 변 교수는 결국 17세 연상의 미국인을 택했고, ‘결혼을 꼭 안한들 어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변 교수의 용기 있는 선택에 러셸은 감동을 받았고, 오히려 결혼을 청했다.

부모님은 반대 끝에 결국 딸의 선택을 따라 주었고, 변 교수는 지인이 제공해준 그라톤의 별장에서 러셸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돈이 없어 의류 창고를 돌며 겨우 16불짜리 찢어진 드레스를 구입해 자수를 놓아 꿰매 입고 손수 만든 부케를 들고 올린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연주자에서 선생으로
둘 다 컨서트 연주자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남편은 연주회를 앞두고는 조용히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없었고, 나는 또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단계에 있었다”고 말하는 변 교수는 ‘76년 연주자의 꿈을 접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처음 NEC 예비학교에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한 변 교수는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좌절감을 맛봤다. 하지만 오뚜기 같은 성정으로 다시 일어나 최선을 다해 가르쳤고, 가르친 아이들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NEC 예비학교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과장이 나를 거절했는데 디렉터가 나를 초청했다”는 것이 변 교수의 말이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NEC 예비학교에서 가르친 아이들이 대학 입학에서 최고점을 받기 시작했고, 그 능력을 인정 받아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NEC 교수가 되었다. 당시 러셸은 부인이라는 이유로 추천을 하지 않았다.

예술은 단기간에 되지 않는다
“예술은 단기간에 되지 않는다. 썩을 때까지 썩고 안에서 발효가 돼야 자기만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변 교수의 음악에 대한 지론이다.

“진정한 음악인으로 나려면 마음 속에서 터져 날 봇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선생은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변 교수는” 다른 사람들 마음에 돈으로 줄 수 없는 평화와 치유를 주는 것이 음악인이 할 일”이라며 “덜 된 것을 주는 것보다는 좋은 것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길
변 교수는 지난 25일 오후 그랜드 피아노 위로 평화로운 햇살이 드리워진 자신의 교습실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바로 그날이 남편 러셸의 81번째 생일날이라고 밝힌 변 교수는 아침에 남편을 향해 “상상할 수 있어요? 내가 대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고, 풀장의 물을 다 비우고 임시학교로 사용하던 그곳에서 발이 얼어가며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는데...”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지난 40년 간 음악인이자 크리스찬으로 살아온 변 교수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손길이 나보다 먼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 곳으로 간 것뿐이라며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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