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2 ] 훔친 사과의 추억
보스톤코리아  2019-09-30, 10:35:44 
흐드러지게 핀 하얀 사과 꽃들을 보던 지난 5월만 해도 그것들은 그냥 아름다운 꽃이었다. 시인 김춘수가 노래했던 것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꽃이었다. 매일 사진을 찍었다. 돈 드는 일도 아니니까. 다시는 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수십 방씩 사진을 찍는 이유는 아마도 본능적 소유욕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일 것이다. 

예상대로 나는 사과 꽃 사진들을 다시는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우연히 계란 노른자만 해진 사과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전화기에서 사과 꽃 사진들을 소환했다. 아직 침샘을 자극할 크기는 아니지만 상상력, 혹은 기억력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나는 영천의 어떤 군사학교에 있었다. 훔친 사과의 맛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게 된 것은 그 때였다. 그 사과는 너무 맛있어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작게 한 입 베어 먹고는 주머니에 넣고, 또 한 입 베어 먹고는 주머니에 넣고... 

사과는 호오가 분명하고 자기표현이 아주 강한 놈이다. 햇볕을 쬐어주면 그 부분만 빨갛게 물들고 반대쪽은 풋사과 색 그대로이다. 아버지는 사과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셨다. 일정한 기간씩 사과들을 일일이 돌려서 햇빛이 고루 비치게 하셨다. 우리 집 사과만이 유난히 새빨간 이유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빨갛지 않은 사과를 '홍옥'이라 부르는 데는 저항감이 느껴졌다. 

작년 가을이던가. 훔칠 '뻔한' 사과의 추억이 있다. 어느 집 정원에 샛노란 과일이 눈에 띄어 가까이 가봤더니 노란 사과였다. 노란 사과. 물론 마트에 가면 온갖 색깔의 사과가 있다. 아내를 따라 시장을 갈 때마다 미국은 정말 과일이 다양하다고 감탄하면서 바라보던 그 사과들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정원에서 마주한 노란 사과는 아주 특별했다. 사과나무에 달린 노란 사과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 여기가 영천이었다면...훔친 사과의 추억이 침샘과 함께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나는 사진을 찍고, 사과의 감촉을 느끼고, 고인 침을 들이키면서 초인종을 눌렀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나왔다. 사과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Of course, you can.” 할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촬영을 허락했다. 할머니에 따르면 이 사과는 관상용이라서 먹을 수가 없단다. 

아내는 사과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깎은 후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건 서울 사람들이 먹는 방식이다. 사과는 모름지기 껍질 채로 베어 먹어야 제맛이 난다. 사각, 하는 음향과 함께 입안에 감도는 향기와 즙. 조각난 사과는 절대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생각해보라. 왜 훔친 사과가 더 맛있겠는가. 훔친 사과는 4등분하거나 깎을 시간이 없다. 완전범죄를 위해서는 훔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한다. 내가 수십 년 전 영천의 어느 과수원에서 그랬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그 사과를 적극적으로 훔친 것이 아니라 그 사과가 나를 유혹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나는 그때 배고픈 군인의 몸으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배고프고 지친 순간 도로변으로 내민 가지에 달린 사과들이 딱 눈높이에서 탐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머리를 숙여 사과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처럼 나도 눈앞의 방해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도 말했다. 사과가 맛있고 장미가 예쁜 것은 인간을 사랑한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라 번식을 위한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라고. 동물들은 단지 그것들의 이기적 유전자를 위해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그는 설파한다. 이동이 불가능한 식물들은 꽃의 아름다움이나 과일의 맛을 이용해 동물을 유혹해서 대신 씨앗을 퍼뜨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꽃과 잎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보색관계인 것도 동물의 눈에 더 잘 뜨이기 위함이란다. 꽃으로도 과일로도 동물을 유혹할 수 없는 식물은 아예 스스로 동물을 잡아먹어 생존하기도 한다. 식충식물처럼. 

계란 노른자만 한 사과들이 어느새 탁구공만 해졌다. 지금쯤 아기 주먹만 해졌으려나. 좀 더 탐스럽고, 좀 더 도전적으로. 올 가을, 나는 그것들을 보러 다시 그 곳에 갈 것이다. 훔친 사과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러.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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