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안내원도 북한 일상 담는 것 암묵적 동의
보스톤코리아  2015-10-29, 23:28:02 
북한의 일상을 표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김대실 감독
북한의 일상을 표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김대실 감독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북한에 관한 정보는 심심치 않게 접한다. 탈북자, 인권, 핵실험, 포격, 도발 미사일, 경제제제, 김정은, 숙청 등의 단어가 쉽사리 연상되는 북한이다. 상당수 우리의 북한 상상력은 거기서 멈춘다. 북한 주민의 일상이란 단어는 휘귀종일 수밖에 없다.

같은 하늘 아래이지만 북한 주민들의 일상은 어떨까. 북한에 대해 끊임없는 적개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주제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는 다큐멘타리 감독 대실 김 깁슨의 시선으로 북한의 일상을 담은 다큐 영화가 11월 3일 오후 5시 보스톤 대학에서 상영된다.

궁금했다. 분명 북한 안내원의 통제가 있었을 것인데 일상을 찍은 필름이라니.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도 물론 북한 안내원의 통제 하에서 찍힌 필름이다. 그러나 감독은 인간적인 접근으로 통제의 끈을 늦추고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담아냈다.

어릴 때 살았던 보았던 그 모습을 지금에도 확인한 감독은 진정한 고향을 느낀다. 그러나 21세기의 급변하는 시대에 여전함을 간직한 북한 주민들에게서 안타까움도 놓치지 않는다. 북한인들에게서만 그런 순수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가. 감독이 너무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을 담는 것이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남한에서 삶을 거의 영위했던 사람들은 그렇다.

그러나 김 감독이 필름에 입문한 이래 소수자, 약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던 과거 작품들을 돌아보면 그의 시신을 한 켠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다큐멘타리 영화가 궁금하다. 지금껏 아무도 이만큼 북한의 과거를 잘 이해한 감독이 찍은 북한의 일상은 없었다.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감독과 이메일로 주고 받은 일문 일답이다. 직접 인터뷰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김 감독이었다.

People Are the Sky
시간 : 11월 3일 오후 5시
장소 : GSU (George Sherman Union) Conference Auditorium, 775 Commonwealth Ave., 2nd floor.

지금까지 받은 많은 북한관련 뉴스와 정보를 종합하면 북한은 절대 홍보용 주민들 삶이 아니면 촬영과 취재를 불허했습니다. 감독님께서 담은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정말 일상적인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가?
긍정 부정 모두다.
북한은 나를 비롯한 외부인들에게 주민들의 집을 방문토록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실제 가정생활을 접하거나 실제 집을 촬영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영화가 제한적이지만 북한 주민들을 촬영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한 번은 나는 신생아를 가진 젊은 부부의 집에 갈 수 있었다. 남편과 부인은 섬유공장 노동자였다. 분명히 이들은 나를 위해 선택된 사람들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보다 생활 조건이 좋은 집이었다. 이 집은 괜찮은 집이었으며 냉장고 등 일부 현대식 편의시설이 있었다. 또한 내가 본 사람의 대부분은 가이드가 안내해준 거리, 공원, 호텔, 식당 등에서 마주친 사람이었다. 이들은 좋은 옷에 활짝 웃는 얼굴에 괜찮아 보였고 굶주림의 흔적은 없었다. 지하철을 탔을 때도 모두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많은 잘생긴 남성들과 아름다운 북한 여성들을 평양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평양을 벗어나 일반 사람들의 일상으로 침투하려 하였고 나는 그들의 옷과 얼굴표정에서 삶에 찌든 곤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포함한 여느 서양 국가들의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나쁘다 할 수 없었다.
대도시와 시골의 격차는 나에게 별 놀라움이 아니었다. 특별히 언급할 것은 내가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학생들과 거리 공원에서 만났던 어린이 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미국은 물론 남한의 어린이들보다 적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빛났고 총기가 있었으며 즐겁고, 희망적이었고 전체적으로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방과 후 특별활동을 하는 <어린이 집>에서 본 아이들의 재능에 한 마디로 깜짝 놀랬다. 그들 중 대부분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동서양 춤, 수영, 다이빙, 무용 등에 능숙했다. 이는 북한이 결코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이들은 국가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만약 1번 답이 그렇다는 답변이라면) 어떻게 북한 주민들을 촬영할 수 있었는가? 북한 당국의 협조는 어렵지 않으셨나?
처음은 UN 북한 대표부와의 만남이었다. 만남이 잘 진행되어서 희망을 가지고 미국인의 친구를 통해 북한에 요청했지만 평양에서 6개월만에 돌아온 소식은 거절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후 난 한국계 미국 시민들의 북한 관광 방문을 돕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KA-NCC)이 그것이다. 행운처럼 나는 이 KA-NCC회장을 알게 됐다. 그는 촬영 공식 요청을 과거처럼 국무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KA-NCC와 일하는 사람을 통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필름의 목적 및 이유 등 3페이지에 달하는 요청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2012년 마침내 나는 평양을 방문하는 한국계 미국인 즉 한인 그룹에 속해 있었다. 나는 카메라맨과 함께였다. 그는 한인으로 체류 경비만 지급하면 다른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2013년 다시 북한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장시간의 촬영이었다. 나는 카메라맨에게 체류비는 물론 보수도 지불해야 했다. 정말 좋았던 것은 북한 당국이 자체 카메라맨을 붙여 줬다는 것이다. 그는 아주 프로패셔널이어서 나는 그의 촬영분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다.
북한 촬영 허가를 받았을 때 나는 이 촬영 허가가 미국계 한인으로서는 처음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나 갈 수 있고 누구나 찍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항상 정부가 지정해준 카메라맨 이외에 한 명 또는 두 명의 안내원을 동반하고 다녔다. 그들은 지정해준 장소와 지정해준 사람만을 촬영할 것을 주문했다.
심지어 정상적인 상황일지라도 사람을 촬영하는데는 명확하거나 때로는 숨겨진 문제들이 있다. 북한에서 나는 안내원들의 감독 하에 촬영해야 하는 추가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안내원들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누구와 만날 지 모두 알고 있었다. 이는 때로 내가 원하는 촬영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런 환경일지라도 언제든지 유연하고 상상력 있으며 순간적인 의도를 가진 눈과 귀를 열면 그리고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면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
촬영 때는 모든 신경과 집중이 촬영에 가 있기 때문에 먹거나, 걷거나, 말하는 모든 행동들 와중에서도 머리에는 촬영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맴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오감 외 특별한 감각까지 열어 모든 것을 흡수하고자 한다. 핵심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리 규정하거나 설정한 사람이나 사물이 없었다. 나는 상대방이 여유가 있을 때 빠르고 결정적이어야 했다. 나처럼 낯선사람이 어떻게 지나가는 사람의 신뢰나 관심을 얻겠는가? 빠른 유머감각보다 마법스러운 것은 없다.
한국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이 있다. 웃음을 나누고자 하는 의사는 반응을 원하는 대상의 빠른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 북한의 가장 명석한 대학 학생들에게 “내 머리 모양이 흉측하나요?” “왜 당신은 그리 빈둥거리나요?”하는 식으로 묻는다. 안내원이 정한 룰을 때로는 따르지 않아 딱딱하게 경직된 그들에게 “나무하고 말할 수 있나요? 나무에게 말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꺼이 감정을 공유하려는 노력이다. 웃음을 나누고자하는 것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을 나누고자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얼마나 낯선 사람인가에 상관없이 표면을 넘어 상대방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 내면의 명령을 따르고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다. 즉 한사람이 정직함과 진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항상 통한다.
사람들은 때론 나의 활달하고 즐거운 개인 성품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외에 난 내가 내일을 하듯 그들도 그들 일에 충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은밀하게 우리는 서로의 일이 잘 되길 바란 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에게는 내가 골칫거리였지만 그들은 내가 자신의 고향 땅의 내음을 즐기고 사람들과 가까워지려 하는 바스켓 모양의 파마머리의 나이든 사람으로 늘 여겼다. 
금지된 사람과 장소에 접근하는 것을 장애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창의적인 불복종이 나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먼 거리에서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과 말할 수 있었다. 행동 이전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들에게 달려갔다. 안내원이 나를 잡을 때 즈음이면 내 카메라맨은 이미 촬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장애는 내게 종종 창의적인 힘이 됐다.

촬영은 언제 시작해 언제 끝났는지요?
2012년과 2013년에 두번 방문했다. 2012년에는 짧았지만 2013년에는 좀더 오랫동안 촬영했고 평양 밖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필름의 제목이 '사람이 하늘이다 (People Are the Sky)'인데 동학혁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북한 주민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타리 제목으로 선정한 것에는 어떤 의미와 이유가 담겨 있는지요?
영화의 제목은 동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동학은 19세기 한국에 일었던 철학이자 종교다. 동학은 신이 하느님이며 모든 사람들은 신과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이는 일반 사람들이 바로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십년 간의 일제 치하에서 한국이 독립하고 남북이 분단되었다.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고 동학 사상도 살아 있었다.
위대한 배움의 센터에서 직원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 그는 모든 정부 빌딩은 사람들을 우러러 보는 위대한 배움의 센터 아래 건축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동학과 내 남편 돈이 내게 했던 것을 생각나게 했다.
동학과 이것의 가르침은“사람은 하늘이다” 그리고 남편 돈은 아이오와 하늘 아래 옥수수밭에서 모든 사람은 자연과 신을 내재했다고 믿었다. 나는 돈의 아이오와 하늘이 한국 동학의 하늘과 일맥상통하다고 느꼈다. 신이 하늘이라면 사람도 하늘이라는 일반적인 신념이 같은 측면에서 그렇다.

탈북자들과 북한 인민들의 삶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들의 삶을 다큐멘타리를 만드신 감독의 눈으로 비교해 주신다면 어떤가요?
나라를 탈출한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나라를 떠나야 했던 자신들의 이유가 있다. 아직도 북한에 머불고 있는 사람들을 한정적으로 본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춰보면 이들의 관점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주민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아주 유사한 삶을 살고 있었다. 희망과 좀더 나은 생활에 대한 야망과 아이들이 좀더 즐겁고 편안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양육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혀 끓임없는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았다. 인권침해가 세상에서 가장 심하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알기론) 미국을 비롯한 다른 어떤 나라의 상황보다 나쁘지 않았다.

북한에서 태어났던 사람으로서 고향을 돌아본 소회가 바로 다큐멘타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소감을 말씀하신다면?
무엇을 보게 될 지 몰랐다. 한국 속담처럼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70년을 생각해보라. 그래도 나는 그 동안 미디어 –신문과 방송/케이블-에서 묘사하고 알렸던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와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7살이었을 때 당시 북한에서 살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시절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그리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맞았던 것이다.
인천 공항에 내렸을 때 케네디 공항이 초라해짐을 알았다. 크고 깨끗하고 좋은 시설을 갖췄다. 그럼에도 나는 슬펐고 반감이 생겼으며 내가 자란 땅에서 피어나는 자본의 냄새에 토할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뉴욕시의 거리보다 더 많은 디자이너 고급 상점들이 있었다. 한 때 나의 고향이었던 곳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곳을 빨리 떠나자였다.
평양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 공항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공항은 내 남편 돈과 아이오와 서쪽에 거주하는 그의 부모님을 방문할 때 몇차례 갔던 곳이다. 평양공항은 수도에 있는 국제공항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고향처럼 느꼈다. 내가 그리던 고향이었다. 사람들은 순수했고 점잖았고 우호적이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친절했고 나를 환영했다. 이것은 1945년 겨울 원하지 않았지만 떠나야 했던 나의 고향으로의 귀향이었다.안내원이 운전하는 밴에 올라 탔을 때 나는 귀향이란 느낌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70년 전 기억에 있던 사람들처럼 순수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지. 이것은 정말로 좋았지만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20, 21세기 세계 어느 곳에서든 빠르게 변하는 가운데 이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북한이란 장소나 나라가 내 고향이 아니라 그곳의 주민, 일반 사람들이 바로 내 고향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교수, 공무원 신분을 버리고 다큐멘타리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는지요?
다큐멘타리 감독이 된 것에 대해 나는 과거엔 우연이었다고 말해왔지만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내가 이루길 원하는 것들의 자연적인 최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Ph.D를 보유한 학자였다. 이는 개념적으로 지적인 문제들에 질문을 던지도록 갖추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나의 관심과 우리의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램이 여기에 더해졌다. 영화제작 그 자체는 공동작업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공동작업을 할 수 있는 존재다. 학자, 예술가(난 그림을 그렸다), 꿈꾸는 사람.
이런 것들을 합쳐 나의 첫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은 1992년 LA 폭동이었다. 1991년 그 유명한 킹의 폭행사건은 한 순수한 목격자 조지 할러데이가 영상을 촬영하면서 미국 및 세계적인 미디어의 관심을 끌게 했다. 이후 13개월 동안 NBC, CBS 그리고 ABC 방송사는 저녁 뉴스 시간에만 잔혹한 구타와 체포에 관한 보도를 무려 87번이나 다뤘다. 또한 4명의 가해 경관의 무죄선언도 보도했고 이로 인한 폭동도 보도했다. 미디어는 그들이 다룰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뤘다. 특히 소수민족 문제에 있어서 억압된 선정성은 인간의 비극을 통계와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얼마의 피해를 냈고, 몇 명이 죽었으며, 몇 명이 체포됐는지 등에 아주 예민했다. 무엇보다 언론은 한국인들과 흑인사회의 갈등에 대해서 이슈화 하는데 급급했다.
5일 간의 폭동상황을 보면서 난 한인들의 비극적인 상실에 대해 슬퍼했고 미국은 과거 인디언 주민들에 대한 인종청소, 흑인들의 노예제도, 이민자들의 착취, 그리고 빈부의 광대한 격차를 만든 고삐 풀린 자본주의 등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권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위반해왔다는 치명적인 사회적 약점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당시 발생했던 사건의 슬픔이 내 심장 깊숙히 찔렀다면 언론의 보도는 나를 미치도록 분노케 했다. 언론들은 한흑 갈등이 마치 사태의 원인처럼 그려버렸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워싱턴 DC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능하면 많이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인종갈등과 경제적 불평등, 역사적 문제들, 방치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 위안부, 강제노역자들, 이민자들 등이 그 대상이었다.

마지막으로 남한에 가보신 것이 언제인지요?
2013년 북한에 가는길에 들렀다.

혹시 이 영화 제작과 관련하여 남한 정부나 정보당국 등으로부터 압력을 받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렇지 않다.

남한에서 이영화를 상영할 계획은 있으신지요?
남한에서 상영할 정확한 계획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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