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12 ] 4월은 잔인한 달?
보스톤코리아  2020-04-27, 10:45:38 
“4월은 잔인한 달.”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구절. 사람들은 저마다 왜 4월이 잔인한 달인지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 혹자는 전쟁, 혹자는 질병, 혹자는 자연재해를 떠올린다. 나도 한때는 친구들과 그 이유를 생각했었다. 청년시절, 매년 4.19 기념일이 되면 민주화 투쟁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했다. 역시 4월은 잔인한 달이야, 라고. 

하지만 잔인한 일들이 어디 4월에만 있었겠는가. 일 년 열두 달 중 전쟁이나 질병이나 자연재해가 없던 달이 있던가. 잔인한 일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달려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유독 4월이 잔인한 달이란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일까. 이 구절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한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란 시에서 언급되면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4월보다는 오히려 눈 덮힌 겨울이 더 낫다는 뜻으로 읽힌다.  

엘리엇은 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시가 발표된 1922년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노벨상을 수상한 시인이 남들보다는 더 예리한 눈으로 어떤 잔인한 사건들을 목도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인이란 사람들은 원래 남이 보지 못하는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내는 천재들이니까. 사실 시인의 의도 따위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시의. 혹은 문학의 소비자인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인식 범위 안에서 그것을 소비할 뿐이니까. 1922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없었던 상관없다. 오늘 우리에게, 4월이 왜 잔인한가를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는 이미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한 셈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시를 또 떠올렸을까. 매년 4월이 되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서 듣게 되는 이 구절. 그러나 나는 한마디로 이 구절이 맘에 들지 않는다. 작약의 발그레한 새싹이 동토를 뚫고 올라오고, 목련은 잎보다 먼저 연분홍 꽃잎들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크로커스가 보라색으로 들판을 휘덮는 4월이 아니던가. 도대체 잔인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것인지. 오히려 4월은 약동하는 생명의 용트림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 아닌가. 적어도 엘리엇이 살던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말이다. 내가 보는 북반구의 4월은 생명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다. 

4월이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절의 소비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하다. 그가 4월이란 특정한 달을 언급한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4월은 특정한 달이 아니라 단순히 현대를 의미하는 은유일 뿐이다. 문학평론가들은 <황무지>가 그보다 약 5백여 년 전에 쓰여진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대한 패러디이자 반작용으로 쓰여졌다고 말한다. “4월의 감미로운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속속들이 꿰뚫고/ 모든 물관을 적시어 주면/ 덕분에 꽃이 피어나고/ 서풍 또한 달콤한 입김을/ 밭과 숲의 어린 가지에 불어넣어준다.” 새들이 노래하고 자연이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니까 사람들이 순례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4월이 희망과 설렘의 달이라는 초서의 시를 뒤집어 엘리엇은 거꾸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이다. 뜬금없이 4월이 소환된 것이 아니다. 엘리엇은 중세 영문학을 대표하는 초서의 시를 뒤집어 20세기의 부조리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굳이 4월에 있었던,  혹은 있을 법한 잔인한 일들을 찾아볼 필요는 없다. 엘리엇이 보기에 20세기가 15세기보다 더 나빠졌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말한다. 아, 옛날이 좋았어, 라고. 로마 시대보다는 고전 그리스 시대가 더 좋았고, 제정 로마시대보다는 초기 공화정 로마시대가 더 좋았다고. 또 중세보다는 제정 로마시대가 더 좋았다고. 과거의 어떠한 거대한 사건보다도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상황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다시 보아도 4월은 역시 잔인한 달이 아니라 희망과 약속, 생명과 약동의 계절이다.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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