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5-27, 12:06:06 
화물차는 대전역에 정차하고 말았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다. 부상당한 육군 대위 한분이 나타나 태워 달라고 간청하는것이다. 육군병원에서 막 나오는 길인데 삼량진까지 간다고 했다. 

야전병원이 후퇴하게 되자 걸을 수 있는 부상자는 다 내보냈던 모양이다. 사정이 딱하게 보여 경비병이 못보는 사이에 얼른 태웠다. 후에 알았지만 그 대위가 삼량진 양조장의 아들이라고 하더라. 

이튿날 대전역을 출발한 화물열차는 저녘무렵 삼량진역에 도착했다. 군용차들은 주로 밤에만 운행하는 것 같았다. 그때는 단전철도라 화물열차는 선로가 열리지 않아 삼량진역에서 오래동안 머물었다. 그래도 조급했던 마음이 삼량진에서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목격지인 부산이 그리 멀지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 플랫 홈에는 물병과 과일상자를 들고 다니면서 “내것 사이소, 내것 사이소” 하고 외치고 다니는 아이들이 오히려 평화스러워 보였다. 

화물차가 삼량진역에 정차하는 동안 이병도 관장님이 규장각 도서의 보관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와 함께 먼저 부산으로 가셨다. 삼량진역에서는 경비하는 군인이 없어서 다소 자유스러웠다. 마침 삼량진역 앞에 이발소가 보이길래 그 동안 머리를 깎지 못했기에 뛰어가 머리를 깎았다. 그런데 화물차가 출발하려고 기적을 울리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깎다 말고 뛰어나와 차에 올라탔다. 모자가 있어야지, 같이가던 친구들이 내 머리꼴을 보고 놀려대는 것이다. 머리는 부산에 와서야 마저 깎았다.

화물차는 이튿날 오후에야 부산으로 떠났다. 그런데 부산역의 선로가 비어 있지 않아 부산진에서 정차하고 말았다. 김두헌 총장님 가족은 부산진에서 내리신 것으로 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오전 10시 경이다. 이병도 관장님이 부산역에 나오셨다. 제 1차로 부산에 가지고 내려간 승정원일기 등 규장각도서는 부산시 광복동에 있는 재청 창고 4층에 가져다 보관했다. 이 창고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경남도청에 교섭해서 얻은 창고라고 한다. 그래서 1, 2, 3 층은 모두 박물관에서 사용하고 우리는 4층의 한구석에 책을 가져다 쌓아 놓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서인 내가 책 옆에서 자면서 숙직을 했다. 국립 박물관장 진재원 박사님도 4층에서 혼자 주무시는 것이다. 

"나 국립 박물관장인데 누구냐" 고 하시기에 서울대 도서관 백린 이라고 대답했더니, 담배를 피면 안된다고 하셨다. 후일 대학에서 김재원 박사님께 고고학 강의를 받았지만, 김 박사님을 뵌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그런데 며칠 후에 국립박물관장 김재원박사가 화제가 무섭다고 하시면서 숙직하는 사람은 다 나가달라고 하셨다.

나는 관제청 창고에 있지 못하고 나와 서울에서  같이 내려온 친구들과 함께 서대신동의 산밑에 잠만 자기로 하고 방 하나를 얻었다. 그런데 그 방이 국제결혼한 한국여성이 세들어 사는 방이다. 남편이 일본에 출장간 사이에 혼자있기가 무서워서 우리 다섯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다. 돈도없고 또 방을 얻기가 어려워서 그런대로 한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때아니게 비가 축축히 내리는 어느날 밤이었다. 잠이 들어 자고있는 한 밤중에 미군장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써치 라이트를 들이대고 일어나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다. 일본에 출장갔다고 하던 녀석이 여편내가 의심스러워 불시에 들어닥친 것이다. 그런데 한방에서 다섯 사람이 자고 있으니, 별사고가 없을 것 같이 보였던지 권총을 빼들고 당장 나가라고만 했다. 영어를 못하는 우리는 한 마디의 변명도 못하고, “예스, 예스, 오케이” 하면서 비 오는밤에 쫓겨나 여관으로 갔다. 

다섯 사람이 아침, 저녁의 식사를 취하면서 여관에 오래 묵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마침 상부에서 소개도서를 지킬 사람만 남고 다른 직원은 다 서울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병도 관장이 차순영과 백린만 부산에 남으라고 하셨고 그래서 이호규, 이조혁, 남상돈 세 친구는 서울로 간다고 떠났다. 

그런데 제 2차로 1950년 12월 22일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장 김두종 박사가 이조실록 <강화본> 1188책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했다. 차순영과 나는 부산역으로 가 이조실록을 인수하여 대교동의 대한부인회 부산지부의 창고에 가져다 보관했다. 그리고 제 3차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도서관 사서장 호기현씨가 1950년 12월 28일에 이조실록 <태백산본>864책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했다.
다음회에 계속…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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