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5. 네즈 페르세의 도주의 길 (3)
보스톤코리아  2016-06-13, 11:44:29 
또 하나의 긴 길(도주의 길) (계속)
네즈 페르세는 비터루트 산맥(Bitterroot Range)을 넘어 아이다호를 벗어나 몬태나로 들어가면 미군이 더 이상 추격해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군은 이들을 계속 쫓아갔다. 이들은 미군을 속이기 위하여 캐나다를 향하여 북쪽으로 가는 대신 남쪽으로 내려와 엘로스톤국립공원을 관통했다. 미군이 매수한 인디언 정찰병(scout)들의 활약으로 이들의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미군들은 집요하게 추격해 왔다. 옐로스톤을 지나 로키산맥을 넘어 가서 크로우 인디언들을 만났다. 그러나 지금의 크로우족은 미군과 한 통속이 되어서 미군의 앞잡이로서의 정찰병(scout)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하였으며 네즈 페르세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네즈페르세의 말을 훔쳐가기도 하였다. 

이제 네즈 페르세에게 남은 선택은 캐나다로 시팅불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셉의 무리들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캐나다로 향했다. 캐나다와 가까워지면서 이제는 하워드 부대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 9월 30일 갑자기 마일스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나타났다. 마일스 부대는 네즈  페르세 일행을  중간에서 차단시킬 목적으로 몬태나 주에 있던 키오 요새(Fort Keogh; 종전 이름은 Tongue River Cantonment이었음)로부터 출발하였다. 마일스의 부대에는 옛 카스터가 지휘하던 7기병대도 포함돼  있었으며  로빈슨 요새(Fort Robinson)에서  차출된 라코타 출신 용병들도 끼여 있었다. 이 용병들은 크레이지 호스가 동족이 동족을 잡으러 다니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여 머리끝까지 화나게 만들었던 그 지원병들이었다. 캐나다로부터 불과 60여km  떨어진 베어스 포 마운틴(Bear’s Paw Mountains)에서 며칠간 미군과 대치하다가  10월  5일 결국 조셉은 투항하였다. 1900 km에 가까운 피눈물 나는 도주의 길은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일행 중 몇 사람은 여기서도 또 탈출하여 시팅불이 있는 캐나다로 무사히 들어갔다고 한다.

네즈 페르세 인디언과 조셉 추장은 백인들로부터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백인과의 전쟁 중에 머리가죽을 벗긴다든가 하는 불필요한 잔혹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셔먼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전쟁과 상관없는 민간인은 해치지 않았고 포로로 잡힌 여자들은 다 돌려보냈다는 점도 인정을 받았다. 신문에서는 조셉 추장을 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이라고까지 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백인들은 조셉이 전투 추장 역할까지 도맡은 네즈 페르세족의 대추장으로 잘못 알고 있은 듯하다. 조셉은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전투 추장은 아니었다. 전투 추장은 따로 있었다. 이들 전투추장들과 죠셉을 포함한 다른 추장들로 구성된 부족회의에서 작전계획 등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셔먼도 네즈 페르세가 보여준 전술과 전략은 다른 여느 군대보다도 훌륭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몬태나로부터 캔사스로 이송되는 도중에 노스다코타의 비스마르크 시에 머물렀을 때에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환영하였으며 융숭한 음식물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투항 협상 시 마일스 장군은 네즈 페르세 인디언들을 투항 후 아이다호 거주지역으로 보내 준다고 약속했으나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총사령관은 이를 번복하고 캔사스의  리번워스 요새(Fort Leavenworth)로 보내 버렸다. 캔사스 수용소의 환경은 네즈 페르세 인디언들에겐 지옥처럼 느껴졌다. 수용되었던 인디언들 중 상당수가 말라리아 등 전염병으로 죽어 갔다. 조셉 추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이들은 캔사스에서 오클라호마로 거주지를 옮겼으나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1885년 드디어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268명은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날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셉을 비롯한 150명은 아이다호 백인 거주자들이 거세게 항의함에 따라 아이다호 내의 네즈 페르세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워싱턴 주의 콜빌(Colville)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동하여 다른 부족과 섞여 살도록 조치되었다. 조셉은 그곳에서 190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진단서에는 사망 원인이 ‘화병(broken heart)'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패츠가 수퍼볼 차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2016.06.13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정성일 기자 = 패트리어츠 팬이라고 할지라도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팀 역사상 최고의 해로 꼽히는 때가 2004년이다. 물론 그 해에..
신영의 세상 스케치 549회 2016.06.13
내 아들의 여자!!
한담객설閑談客說: 조자룡의 헌칼 2016.06.13
  여름이다. 하지夏至가 십여일 남았으니 한해가 꺾였다.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모두 건강하게 여름을 맞고 계신지?  몇년전 이다. 한국 대통령..
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5. 네즈 페르세의 도주의 길 (3) 2016.06.13
또 하나의 긴 길(도주의 길) (계속)네즈 페르세는 비터루트 산맥(Bitterroot Range)을 넘어 아이다호를 벗어나 몬태나로 들어가면 미군이 더 이상 추격..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34 2016.06.13
화랑세기花郞世紀, 3세 풍월주風月主 모랑毛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