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보로 싯-인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보스톤코리아  2012-01-30, 13:06:09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 서문 중에서)

매년 2월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흑인 역사의 달 (Black History Month)로 지켜진다. 그리고 우연이긴 하지만, 미국에서의 흑인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치열했던 “1960년대”라는 분수령을 만드는 사건은 1960년 2월 1일 발생했다. 흑백 인종간을 분리한 공립학교 교육이 위헌 판결(Brown Vs.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1954) 이 났어도, 로자 파크스의 승차거부 사건(1955)에 이어 들불처럼 번진 버스 보이콧의 힘으로 대중 교통에서의 인종 분리가 위법이라는 판결(Browder v. Gayle, 1956)이 있었어도, 아직 남부 11개 주에 크고 작은 흑, 백간 인종분리가 법 (Jim Craw Laws)으로 지탱되고 있던 1960년 2월 1일.

그린스보로의 노스 캐롤라이나 농업 및 기술대학 (North Carolina Agricultural and Technical State University)의 흑인 대학생 네 명이 그린스보로 소재 백인 전용 식당 울월스 (Woolworth's)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음식과 커피를 주문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항의의 표시로 일명 싯-인(sit-in) 농성*을 시작한다.
싯-인의 풍경은 이렇다.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는 이유로 서비스를 거부당한 흑인 학생들은 요구받은 대로 자리를 뜨는 대신 그 자리를 점유한 채 다시 정중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또 재차 주문한다. 결국 그 고집에 못 이긴 식당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주문한 음식을 내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법대로” 연행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싯-인 시위 참가자들은 “법에 따른” 연행뿐만 아니라, 일부 인종주의적 백인들에 의한 린치와 협박이라는 위험을 무릎써야했다. 하지만 싯-인 농성자들은 비폭력 불복종 (non-violent & civil disobedient)의 문화를 입은 새로운 운동의 전형을 만들어갔다. 싯-인의 저항 방식은 이후 싯-인 농성이 가장 대규모로 벌어지게 되는 테네시 내슈빌의 간이 식당(Lunch Counter)에서 밑그림이 그려졌는데, “전통적인 흑인 (전용) 대학”의 학생들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어쨌건 그린스보로의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다른 도시에서도 울월스의 타지역 체인점 등을 타겟으로 하는 싯-인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린스보로에서 싯-인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싯-인 농성자의 숫자는 1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흑인 민권운동가들과 이에 동조하는 백인 학생들까지 합류하게되면서 시위의 규모가 더욱 커진다.

그린스보로 등지에서의 싯-인의 여파는 강렬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분리에 반대하는 싯-인 시위는 남부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몇달 뒤 음식점에서 “백인 전용 좌석”은 폐지되었다. 또 한편 싯-인 시위는 1961년부터 인종 분리 문제에 대한 의식을 촉구하며 버스와 기차를 타고 남부 전역을 여행하며 캠페인을 벌이는 프리덤라이드 (Freedom Ride)의 기폭제가 되었다. 어쩌면 싯-인은 인종차별의 문제와 함께, 성차별, 혹은 성적 억압, 전쟁, 그리고 대학의 보수성 등 모든 “존재하는 질서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문화(counter culture) 물꼬를 튼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중,고생들과 흑인 민권 운동을 공부할 때, 직관적인 이해를 힘들어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흑인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별은 현재까지도 여전하니까 1960년대는 더 차별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하지만 기사가 자리를 비키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거나, 식당에 앉았다고, 혹은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서 집단 협박 혹은 연행의 대상이 되어야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라는 것이 머리로 암기한다고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다행이다. “질서”를 가장한 부당한 권력에 의문을 품거나 다른 상상을 했던 이름 모를 그들 덕에, 그 불과 반세기 전을 오늘 낯설게 여길 수 있어서. 이미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눈치챘겠지만 오늘 칼럼은 2년 전 오늘 타계한 하워드진에 대한 오마주다.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품는 것은, 결코 우둔한 낭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단지 잔인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애, 희생, 용기, 친절로도 이루어져있다. 우리가 복잡한 역사 속에서 강조해두고자 선택하는 것들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최악의 경우만을 바라본다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파괴한다. 만약 사람들이 탁월한 행동을 한 시대와 장소들을 기억한다면(그런 경우는 너무도 많다), 그 기억은 실천을 할 힘을 준다. -하워드 진이 2004년 9월 The Nation에 기고한 “불확실성의 낙관 (The Optimism of Uncertainty)” 중에서. 한글 번역은 어느 블로거의 카피레프트버전을 그대로 인용했음.
*Sit-in은 연좌, 점거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60~70년대 당시 저항운동과 반문화 의 물결 속에 등장했던 몇가지 다른 “ins”와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이 맞다고 보기에 그냥 싯-인으로 표기했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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