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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칼럼니스트김은한 칼럼니스트
훈족과 신라, 가야의 친연성 (6) : 맥궁(貊弓)
보스톤코리아  2015-01-05, 10:14:24   
맥궁,물소 뿔이 활의 중앙 에 위치
맥궁,물소 뿔이 활의 중앙 에 위치
지난주에 로마 군대가 훈족을 당해내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로 로마는 훈족이 가지고 있었던 말안장, 발등자를 비롯한 첨단 마구가 없었고,  훈족의 각궁(角弓) 성능이 로마 활에 비해 절대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각궁(角弓)은 시위를 당기고 놓을 때 활이 휘는 모습이 특이해서 반곡궁(反曲弓) 또는 만곡궁으로도 부르고, 여러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해서 복합궁으로도 부르는데 주 재료가 물소나 황소의 뿔이라서 각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뼈와 나무를 연결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5개 부분에 마디를 연결해 이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게 크기가 작은 단궁(短弓)이라서 다루는데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각궁은 훈족과 흉노만 사용하던 고유 무기가 아니었다.

선비, 오환 등 여타 북방 유목민들도 각궁은 전장에서 사용했던 표준 무기였다. 중국에서도 각궁을 사용했고 고구려는 당대 최고의 활 맥궁(貊弓)이 있었다. 

중국 춘추시대 때 열자(列子)라는 책에 연각지궁(燕角之弓)이라는 각궁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대에 이미 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맥궁 으로 활을 소는 고구려 기사
맥궁 으로 활을 소는 고구려 기사
 
연나라는 중국 동북구에 있는 나라로 고조선 고구려, 흉노와 이웃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각궁을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구태여 연나라의 각궁만을 거론했던 것은 아직은 여타의 중국 여러 곳에 각궁이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말로도 해석되어진다. 

고구려 맥궁(각궁)에 관한 기록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가 질이 좋은 맥궁이라는 활을 만들어 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제5대 모본왕(慕本王 AD 48-AD53)에 관한 기록이 있다. 왕이 날로 포악함이 더하여 매양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 움직이든지 하면 죽이어 용서치 아니했고,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만곡궁(각궁)을 당기어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1세기나 그 이전에 고구려에서 각궁을 사용한 듯 하다.

중국 남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이 쓴 와유록(臥遊錄)에 한나라 헌제 건안 10년에 고구려 10대 산상왕(AD 197-AD227)이 질 좋은 활을 공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산상왕이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왕 손권에게 사신을 통해 각궁을 보냈다는 기록이 우부강표전(虞溥江表傳)에 기록되어 있다(AD222). 고구려가 다른 나라 왕에게 예물로 보낼 수 있을만큼 고구려 각궁의 성능이 좋았다는 얘기다. 

화살은 대나무가 아니라 광대 싸리나무로 화살대를 만들었는데 일명 호시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기록에 미천왕(AD300-AD331) 31년에 5호16국의 거두 후조(後趙)왕 석륵에게 호시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발굴된  고구려 화살촉 실물
발굴된 고구려 화살촉 실물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활은 훈족의 활처럼 물소뿔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각궁이며 크기가 작은 단궁이라는 것이 이미 서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더 확실하게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벽화에는 활이 5마디로 구분되어 있고 활에 여러 줄무늬가 있어 한눈에도 단일재료로 만든 활이 아니고 복합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활 중에는 물소뿔 2개가 들어간 각궁을 최상품으로 쳤는데 무역을 통해 월남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활 한개를 만들기 위해 물소 한마리를 희생시켜야 했다. 

훈족 복합궁의 사정거리가 200 m였는데 물소뿔로 만든 고구려 각궁은 그보다 더 먼 거리를 날아간 듯 싶다. 

현재 고구려 각궁을 모방한 대한민국 국궁의 사정거리가 400m이고 유효 사거리가 145~300m가 되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참고로 일본 장궁의 사거리는 100m에 불과하다.

고구려에서는 값비싼 물소뿔이 없으면 황소뿔을 대신 사용했는데 활 한 개 만드는데 황소뿔 3개가 필요해서 삼단궁으로 불렸다. 활 한 개  만들기 위해 황소 2마리를 희생시켰다는 말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가 조선의 군사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조선으로 들어오는 물소뿔 무역을 차단한 적도 있다. 그만큼 물소뿔은 각궁의 성능을 제고 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파트였다. 
발굴 해낸 고구려 맥궁 뼈 부분
발굴 해낸 고구려 맥궁 뼈 부분
 
세종대왕 때는 대마도주가 진상한 암수 물소 2마리를 날씨가 따뜻한 진해 지방에서 기르게 하여 13마리로 늘렸는데 한 해 겨울에 날씨가 너무 추워 모두 얼어 죽어버렸다. 

1933년에 AD350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전축분에서 고구려 활의 실물을 발굴하였는데 1600년 전에 만든 활의 뼈 조각은 소의 갈비뼈로 판명되었다. 

신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진흥왕 19(AD558)에 내마(奈麻)와 신득(身得)이라는 사람이 포궁(砲弓)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 효성왕(AD737~AD742)이 그의 어진 신하 신충(信忠)을 활 중의 으뜸인 각궁(角弓)에 비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가 각궁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 중국도 각궁을 사용했지만 활이 중국 군사들의 표준병기가 아니고 칼과 창이 표준 병기였다. 훈족과 흉노는 활이 표준 병기였고 고구려 역시 활이, 특히 각궁이 표준 병기였다.

신라의 경우는 기록이 많지 않아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케 하고 고구려는 문헌의 기록뿐 아니라 고분벽화를 통해 각궁을 사용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기사가 마상에서 몸을 틀어 뒤쪽을 향해 활을 쏘는 배사 장면은 이태리 모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에 있는 그림에서 훈족 병사가 마상에서 몸을 돌려 뒤따르는 로마 병사에게 활을 쏘는 배사 장면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 병사들은 달리는 말에서 두 손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활을 쏠 수 없었고, 더구나 몸을 돌려 활을 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활과 활쏘기에 관한한 훈족과 고구려는 친연성이 있는 것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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