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12.
보스톤코리아  2008-12-01, 20:39:16 
백 린 (역사학자)
당시의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볼 때 지금의 남북한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지금의 남북관계 특히 북핵문제로 인해서 6자 회담이 열리고 있다. 만일 북핵문제로 해서 6.25 사변과 같은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경우 그것은 동북 아시아의 파멸은 물론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제3차 대전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과 미, 중, 소, 일 등 한반도를 위요한 4대 강국이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6자 회담을 계속 개최하고 있다. 그런데 북핵문제를 실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남북한 당사국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라는 것이다. 남북문제로 해서 중국이 나서야 하니 말이다. 당시의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볼 때 지금의 상황과 흡사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사실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당태종의 조명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주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등한 관계로 당태종의 조서를 권고 이상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신라에는 김유신 장군이 있어서 그렇게 만만히 볼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연개소문이 이현장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른 각도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자기를 보고 왕을 시해하였으며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정치를 제 마음대로 한다고 그 전제를 비난하지만 당태종 이세민은 더하여 태자인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인 동생 원길(元吉)의 처를 후궁으로 삼는 부도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연개소문은 일찍부터 당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과 맞붙어 한판 승부를 내보려는 것이다. 이세민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고구려 정벌의 첫째 이유는 중국을 위하는 것이며 그것은 전왕조(수나라 양제의 패전)의 원수를 갚는 일이고 둘째 이유는 고구려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군부(영유왕) 시해의 수치를 만회함이라고 말하면서 고구려 정벌에 출정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서기 644년 11월에 형부상서 장량(張亮)과 병부상서 이적(李勣)에게 보병 6만의 군사를 인솔하고 요서의 조양에 집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수군 4만명과 전선 500척을 동원하고, 현지에서 걸란군과 해(몽고족)의 군대를 합한 대군으로 고구려 정벌의 친정에 나섰다. 이적이 이끄는 군사는 다음해 4월에 요하를 건너 현도성을 함락하고 강화왕 도종(道宗)은 신성(지금의 심양 부근)을 공략하였으며, 영주도독 장검(張儉)은 걸란과 말갈병 등을 인솔하고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였다. 이적은 도종의 군대와 연합하여 개모성을 함락시킨다. 한편 장량은 4만의 수군을 이끌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당나라의 모든 군사가 요동성을 집결한다. 요동성에는 시조 주몽대왕과 왕비 소서노의 초상화를 모신 역사가 매우 오래된 고성이었다. 이무렵 당태종 이세민은 6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의 남쪽에 와서 진을 쳤다. 요동성에 대한 총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은 이 요동성을 지키기 위하여 국내성과 신성의 군사 4만명을 요동성으로 보내 후원케 하였다.
요동성의 성주는 성문을 굳게 단고 당나라 군사의 공격에 대항하면서 용감히 싸웠다. 14일에 걸친 맹렬한 전투는 쌍방이 모두 그 희생이 컸다. 당나라의 군사는 숫자가 월등히 많은데다가 포차(抛車)와 당차(撞車)를 이용하여 주먹돌을 날려 성문과 누각을 때려부수고 활과 창으로 집중 공격하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더 싸우지 못하고 14일만에 요동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태종은 요동성을 공략한 다음 제장군에게 백암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백암성은 산에 의지하고 큰 강을 끼고 있어서 3면이 절벽이라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대이다. 연노한 성주 손벌음(孫伐音)은 용감하게 잘 대적했으나 영국공 이적이 포차와 당차로 주먹돌을 날려 성문과 누각을 때려부수고 활과 창을 든 병사가 집중 공격하여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당태종은 이 백암성을 암주(岩_)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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