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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한성 백제의 멸망이 아스카 문명의 시작이 되다
보스톤코리아  2011-06-13, 14:42:37   
아차산성 유적 발굴장면
아차산성 유적 발굴장면
백제 개로왕이 등극한 이래로 북쪽의 고구려가 변경을 자주 침범하게 되자 왕 6년에 동생 곤지(琨旨)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 열도에 백제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왕 18년에 사신을 북위(北魏)에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고구려와 전쟁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간곡하게 백제 왕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은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낸 전말을 알게 되면서 백제를 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개로왕에게는 바둑에 몰두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장수왕은 바둑 고수인 도림이라는 중을 백제에 첩자로 파견 하였다. 개로왕은 도림과 바둑에 미쳐서 국고가 탕진되고 민심이 이반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개로왕 21년에 장수왕이 3만의 군사로 백제를 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문주 (文周)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인 (姦人)의 말을 신용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태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너도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너는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고구려식 아차산성
고구려식 아차산성
 개로왕은 문주에게 당시 제일의 검객 목리만치와 조미걸취 (祖彌桀取)를 달려 남쪽으로 보냈다. 이때 고구려군이 하남 위례성의 북성(北城)을 쳐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치니 성 안이 흉흉 하였다. 왕이 도망해 나갔는데 고구려의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조금 있다가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번 침을 뱉고 그 죄를 세어 책망하면서 아단성(阿旦城) 밑으로 포박하여 끌고 와서 살해하였다.
재증걸루는 원래가 백제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사람이었다.

문주는 신라로 가서 1만의 원병을 얻어 돌아 왔지만 한성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 되었기 때문에 목리만치 등과 함께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가서 나라를 다시 세운다. 성왕 때 도읍을 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은 백제의 도읍지가 된다.

당시에 문주왕을 도와 난국을 정리해준 목리만치는 백제 제일가는 검객이었다. 후일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본국검이라는 일본 검도의 원조가 된다. 일본의 소가 지방에 정착한 그는 성을 목 씨에서 소가 씨로 바꾸는데 그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대신의 지위를 물려받고 100년이 넘게 소가 왕국을 이끌어 가게 된다.

또 소가씨는 찬란한 아스카 불교 문화를 일으켜 세우는 주역의 역할을 하게 된다. 개로왕이 죽음을 당한 아단성(阿旦城)은 지금의 아차산성(峨峨山城)이다. 워커힐 골프 연습장 바로 뒤켠에 있는 산으로 백제 책계왕 때 고구려의 가상 침공에 대비하려고 한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에 만든 성이다.

성의 동쪽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두물머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중랑천이 한강으로 합류하고 있어 이곳을 장악하면 한강 하류를 지배할 수 있는 전략의 요충지다.
정상에 오르면 한강 남쪽으로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모든 허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아단성(阿旦城)을 빼앗기고 장수왕에게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을 빼앗기면서 수많은 백제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왜국으로 이동하는 Exodus가 이루어진다. 학자들은 적어도 15만 명이 고향을 등졌다고 한다. 이들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땅에 꽃피운 아스카 문명을 이룩하는 데 주역이 되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스카라는 말도 한반도에서 전래된 말이다. 그 어원을 따져 보기로 한다.

아차산성(阿且山城)은 그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다. 책계왕이 축성할 때는 아차(峨峨) 였는데 광개토왕 비문에는 아침단으로 아단(阿旦)이 되었다. 한강의 옛이름 아리수(阿利水)에서 아(阿)를 따오고 아침과 골짜기를 의미하는 단(旦)을 합쳐 아단성이 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초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성계에서 아침 단(旦)으로 개명하자, 정인지가 고려사를 집필하면서 아단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높을 아(峨) 우뚝 솟을 차(峨)로 바꿔 아차(峨峨)산으로 개명하였다.

글자를 어떻게 쓰든지 아차성은 아침의 성이란 뜻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 아차(峨峨는 이두 표기일 뿐이라고 한다. 우리말 “아” 는 아침(朝)을 뜻하면서 새로움(新), 처음(初), 해(日)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아가 들어가는 말이 많이 있다. 단군이 처음 세운 도읍 이름이 신시(神市) 아사달(阿斯達)로 “아침의 땅” 이란 뜻이다.

옛날에 경상북도 영일 (迎日)의 옛지명이 아진포 (阿珍浦)로 아침바다라는 뜻이다. 밭을 처음 가는 것은 아시갈이(初耕), 처음 대강하는 빨래를 아시빨래라고 하는가 하면 송아지, 강아지, 망아지, 도야지, 병아리처럼 새끼 짐승의 호칭에도 “아 자를 쓰고 있다. 소의 새끼를 송아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소의 수명이 하루(1日)라는 가정 하에 아침 녘의 소 새끼가 되어서 송아지가 된 것이고 강아지, 망아지, 도야지, 병아리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국사를 논의하려고 왕과 대신들이 모이는 장소가 조정(朝廷)으로 “아침마당” 이고 신하들은 조신(朝臣)이 된다. 우리나라 국호조차 조선(朝鮮)으로 아침 중에도 선명하고 고운 아침 이라는 뜻이다. 한민족들이 이렇게 아침 해, 새 것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가 Apollo 문화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침에 해 뜨자마자 열심히 일하다가 해가 지면 가정으로 돌아가는 생활 습관이 몸에 밴 민족이다. 북한에서 수년 전에 별보기 운동이라고 해진 다음에도 일을 더하자는 구호가 먹혀 들지 않았던 것은 수천 년을 지녀온 생활관습에 역행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은 Apollo 문화권의 나라로는 일본이 있다. 일본 고대 문명의 주체가 한반도 사람들이고 일본인들이 한반도 사람들의 피를 80%이상이나 물려 받았으니 당연히 Apollo 문화권일 것이다. 일본(日本) 이라는 국호도 해가 뜨는 곳, 해의 본향이다. 국기도 덩그러니 해 하나만 그려놓고 있다.

“아스카” 는 아침이 밝아 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고어(古語)에서 아침을 앗침이라고 발음했었다. 이 앗침이 일본에 전해졌는데 그들은 받침 발언을 잘못하니까 앗침의 ㅅ 받침을 다음 음절로 옮겨 “아이우에오” 모음과 합쳐 놓으면 아사, 아시, 아스, 아세, 아소가 된다. 실제로 아세만 빼고는 어떤 말을 써도 된다. 아스카는 한반도에서 전해진 말의 변형이다. “아스카”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말이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고대 일본말은 거의가 한반도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산물, 농기구에 관한 한 한국말 그대로다. 삽에서 사비가 되고, 낫에서 나타, 호미에서 쿠파. 경상도 방언 서마에서 시마(島)가 되고 마을에서 무라(村) 가, 고을에서 고호리(郡)로 큰나라(大國) 에서 구다라(百濟), 해에서 히(日)로 빛깔에서 히카리(光), 위에서 우에(上), 총각에서 존가, 동무에서 도무다치(友)로 한이 없다.

무기류는 갑옷(甲) 에서 가부토, 화살(失)에서 사투, 배(舟)에서 폐, 칼(劍) 에서 카리. 공예품은 기와(瓦)에서 가와라, 가마는 그대로 가마로, 복식은 바늘(針) 에서 파리, 갓(笠)에서 카사로, 구슬(珠) 에서 쿠시로 로 끝이 없다. 이것은 거의 모든 일본 문화 생활이 한반도것을 그대로 받아 드렸는데 언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스카의 어원을 말하다 보니 말이 길어지게 된 것이다. 아스카 문화는 고대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이루어 놓은 문화다.

* 지난 호에 게재된 사진 설명 <풍납토성>을 <방이동 백제 고분>으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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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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