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과 장용영壯勇營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6:50:39 
2014-09-12

 노론과 외척 세력으로 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세자시절을 지내온 정조는 즉위 후 자신의 호위 군대를 비롯하여 나라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많은 군비를 증강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최정예 무사들로 만든 호위 군대인 장용영壯勇營이다.74) 정조는 1776년도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홍국영에게 호위 책임을 맡기면서 숙위소를 설치하여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이 숙위소는 1779년 홍국영이 축출되면서 그 정치적인 역할을 다하고 폐지되었다. 그리고 호위 군대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무예가 특출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무관 30명으로 1782년 장용위를 신설하였다. 

 1787년 군사가 50명으로 늘어나면서 장용청으로 승격되었고 1788년에 장용영으로 개명하였다. 장용영으로 개명 당시에는 군사의 수가 500여명 정도였는데 그 후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1793년에는 한양의 내영과 수원 화성의 외영으로 나누었으며, 타 군영들 보다 규묘가 더 컸다. 내외영으로 나눌 당시의 병사의 수가 3,450여명이었다. 

 또 다시 1795년에 재편하는 과정에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호위하고 화성행궁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장용외영은 수원부의 병사들을 흡수하여 오위체제로 재편됨으로 조직이 완성되면서 총 12,000여명의 규모로 늘어 났으며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였던 무술기예의 발전 사업을 이어 받아 이 장용영내에 설치된 사무국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저술케 하였다. 정조의 명을 받은 박제가와 이덕무 그리고 백동수는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바탕으로 많은 병서와 고전을 참조하여 마침내 무술의 기예를 24반으로 체계화하는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하였고,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병서들도 간행하였다. 이런 한층 더 체계화된 새로운 무술서와 병서들을 위주로 다양한 무술기예를 병사들에게 지도 전수할 수 있었다. 

 장용영의 규묘가 커지면서 강력한 호위 군사력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군률이 체계적으로 확립되었으며 군사들의 정예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군사비용의 문제는 많은 신하들이 염려와 비판의 의견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즉 금군과 무예청의 병사들이 충분히 궁궐을 수호할 수 있고 밖으로는 오영의 장정들이 방비를 견고히 하는데, 또 장용영을 설치하고 계속 확대하여 왜 군비를 과용하느냐고 주장하였다. 이에 정조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군부대를 재편하였고 또한 병농일치 정책으로 소위 둔전을 두어 군비를 마련하였으며 왕실의 돈, 즉 자신의 사재인 내탕금을 헐어서 장용영의 군비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왕권은 약화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과정에서 벽파 출신의 영의정 심환지가 장용영의 혁파를 발의하였고 1802년에 폐지되었다. 많은 관원과 병사들은 본래의 군영에 복귀되었다. 

 원활한 운용을 위하여 정조가 내놓았던 많은 내탕금과 장용영에서 조달하였던 많은 재용은 혜청, 호조, 훈국, 어영, 금영, 군기시, 병조 등의 관청과 경기도를 비롯한 각도에 분배되었다. 정순왕후가 정조의 뜻이라면서 실시한 공노비를 폐지할 때도 그들의 임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장용영의 재산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고 규묘를 극히 축소하여 화성을 관리하도록 남겨 두었는데 이것이 ‘총리영’이다.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당시는 현륭원)에 참배할 때 묵었던 행궁이 있는 화성은 6.25 동난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복원되었다. 그 본래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전하고 있는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각 건물 하나하나의 형태와 치수는 물론 사용한 못의 수량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기에 원형 복원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수원은 소위 ‘신도시’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도시’ 개발은 다반사이지만 당시까지만 하여도 모든 고을과 현이 자연 발생하였다. 물론 한양과 같이 수도를 천도하면서 왕궁과 함께 백성들도 불어난 경우는 있지만, 수원의 경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수원에서 약 8km 남쪽에 위치)으로 옮기면서 처음에는 화산 아래 고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화성은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의 설계를 기본으로 하여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건축한 우리나라의 성곽 중 가장 과학적이고 장엄하면서도 우아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성내의 신풍루에 가면 지금도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반’의 시범을 관람할 수 있다. 2003년 무예24기 시범단 창단되어서 매일 두 차례씩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시범을 시연하고 있다. 야뇌 백동수가 펼친 신기의 무예는 시대를 넘어 현대 무사들의 번쩍이는 월도와 함께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화성의 야경은 수원이 자랑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74)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37권 – 1793년)을 참고로 하여 장용영의 내용을 살펴본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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