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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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코리아  2021-02-22, 12:56:46 
창조신 복희와 여와도,투르판 아스타나에서 출토된 7 세기 유물
창조신 복희와 여와도,투르판 아스타나에서 출토된 7 세기 유물
중국 감숙성 돈황에 있는 불교 유적 사원 막고굴(莫高窟)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적 자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막고굴은 고요할 막(莫)에 높힐 고(高)자를 써서 한없이 높다는 뜻이다.

스님들을 수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막고굴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 16국 전진(前秦) 년간으로 AD 366년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366년에 낙준이라는 승려가 돈황 명사산에 홀연히 금빛 속에 천의 부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을 찾아가 첫번째 석굴을 파고 그 안에서 수행한 것이 막고굴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석굴이 만들어지고 이곳이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지자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 제2, 제3의 석굴을 파기 시작해 북위, 북주, 수, 당, 송, 원대를 거쳐 오면서 천년동안에 총 492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곳을 막고굴로 부르지만 천불동, 혹은 돈황 석굴로도 부른다.

명사산은 돈황 남쪽에 있는 모래산인데 1.6km에 걸쳐 석굴이 뚤려 있는데 북쪽편 굴은 승려들과 화공들의 생활공간으로 벽화를 일절 볼 수 없다.

남쪽편 굴에서는 불상과 벽화를 볼 수 있는데 이 벽화를 1m 폭으로 나열하면 무려 45km에 달하는 거리가 된다고 한다. 벽화 못지 않게 가치있는 돈황 문서는 모두 3만여점이나 되는데, 모두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차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개중에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처지를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모두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오아시스 지역의 막고굴은 중앙 아시아와 중국을 오가는 수많은 상인, 순례자들이 오가는 출발점이자 종착역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출발자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벗어나려고 부처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이름은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절벽에 석굴을 조성해서 불상과 벽화로 아름답게 꾸며 이것을 부처님에게 봉헌하면 액운을 잠재울 수 있다고 여행객들을 꼬드겼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돈황 벽화를 그렸던 서용 화백은 불상의 특징도 처음에는 서역의 영향을 받아서 호방하고 색깔이 단순한 반면에 수나라, 당나라 때에는 완벽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당나라 벽화에 큰 점수를 주었다.

막고굴 벽화중 61호굴 산시성 우타이산 지도는 16m가 되는 세계 최대의 실사지도이고, 45호굴의 8세기 칠존상은 당나라때 제작된 불교 미술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고, 220호굴의 벽화는 당나라때 만들어져 천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색 창연한 색감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돈황의 흥망성쇠는 실크로드의 번영과 쇠락의 궤를 함께하고 있었다. 명나라, 청나라 때에 이르러 돈황은 과거의 번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주요 수출품인 차와 도자기가 항해술의 발달로 항로가 개척되면서 해상 실크로드가 육상 실크로드를 대체하게 되었다. 1524년에 명나라가 돈황의 가욕관을 폐쇄하고 서역과의 통행을 중단하였다. 돈황은 가욕관 밖에 고립되었다. 막고굴은 훼손되었고 막고굴의 향 피우는 연기도 사라지게 되었다. 1900년에야 막고굴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장경동(막고굴 17호 굴)
1900년 돈황 석굴에 살고 있던 도사 왕원록이 대규모 청소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조수가 제 16호 굴 벽에 대고 담뱃대를 털었는데, 벽에서 나는 공명소리를 듣고는 벽이 속이 빈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벽을 헐어내자 길이 2.5m, 너비 2.5m, 높이 3m의 석굴 밀실을 발견하였는데 약 3만여점에 달하는 불경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돈황 유물의 정수인 17호굴 장경동의 발견이었다.

왕원록 도사는 청나라 정부에 장경동의 발견을 보고했지만 현장을 밀봉하라는 지시로 끝냈다. 당시의 실권자 서태후에게도 글을 올렸지만 역시 별 반응이 없었다.

마침 장경동에서 보물(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국의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은 1907년에 왕도사를 만나 고문서, 자수품, 회화 등 문서 24상자, 기타 유물 5상자를 사갔으나, 한문, 중국어에 대한 지식이 젼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반출한 물건 중에는 쓸모 없는 것이 많이 섞여 있었다. 스타인은 은 200냥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언어에 뛰어난 소질이 있어 중국어를 비롯해 13개 국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1906년 신장 지역을 탐험 중이었던 펠리오는 돈황에서 고문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우르미치를 떠나 막고굴에 도착한뒤, 그곳에서 3주동안 머물며 가치있는 문서 약 2천점을 추려내어 은 500냥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가 입수한 문서중의 하나가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었다. 펠리오가 가져간 유물의 가치를 알게된 청나라 학자 단방(端方)은 "유물을 다시 팔 수 없겠느냐"라고 부탁했지만 펠리오는 즉시 거절했다고 한다.

막고굴에서 다량의 유물이 쏟아지자 각국은 탐험대를 조직해서 유물을 차지하려는 경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쿄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세습 주지였던 오타니 고즈이(1876-1948)는 2개의 탐사팀을 조직해서 불상, 불경, 벽화, 고문서 등을 걷어 들였는데 거의 5천여점이나되어 이것들을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타니는 유물을 취득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정관리가 너무 방만해 니시혼간지 주지 자라에서 쫓겨나게 되고 승려 5명은 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수감되었다.

당시 오타니가 10년동안 탐사 비용으로 쓴 돈이 교토 1년 예산과 맞먹었다고 한다. 오타니는 재정이 궁핍해지자 오타니 컬렉션의 1/3을 광산 재벌 구하라 후사노스케에게 판매하였다. 구하라는 오타니 컬렉션을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찌 마사다케에게 양도하였다. 이렇게 되어 오타니 컬렉션은 해방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은 최근 3층에 있는 상설 전시관을 "세계 문화관"으로 개편하면서 새롭게 154점을 전시하고 있다. 바로 "오타니 컬렉션"으로 불리는 중앙 아시아 유물이다.

투르판의 배제클리크 석굴 사원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고, 인근의 아스타나 고분, 야르흐, 큼트라, 키질 등에서 나온 것들이다.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창조신 복희와 여와"를 소개하고 있는데 복희는 남신이고 여와는 여신이다. 이 신들은 상반신은 사람이지만 하반신은 뱀의 모양을 하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은 예전에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무덤인데 당나라때 북정 부절도사를 지낸 고구려 유민 고요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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