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대산 사고지 (史庫址) 답사기 > 1
보스톤코리아  2014-04-10, 19:10:42 
1963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대 도서관장 김계숙 박사가 강릉의 오대산 상원사에 고려판 고본(古本) 대장경 한 부가 있다고 하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말씀인 즉 동국대학 총장 조명기 박사가 우리 도서관장에게 오대산 상원사에 아주 오래된 고려대장경 한 부가 있는데 언제 인쇄된 것인지 모르니 한번 가보시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상원사는 월정상의 말사(末寺)였으며 월정사는 오대산 사고의 수호 사찰이었던 것이기에 가는 길에 월정사도 보고 또 사고지를 답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김계숙 관장님을 모시고 을지로 6가에서 강릉행 버스를 타고 강원도의 산길을 몇시간 달려 진부면 경찰관 파출소에 도착했다. 검문경찰관이 나와 승객에 대한 검문이 시작되었다.

검문경찰이 내가 들고있는 5만분지 1 지도를 보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캐묻기에 상원사에 대장경 고본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감정하려고 간다고 하면서 신분증을 보였더니 인적이 드물고  산사람이 혹 내려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우리는 강릉에서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전해종 교수와 만나 월정사에 동행하기로 약속이 돼 있어서 계속 버스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갔다. 강릉은 처음이다. 강릉에서 전해종 교수와 만나 냉면집에서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그런데 전해종 교수가 강릉에 볼 일이 새로 생겨 같이 동행할 수가 없다고 하여 김계숙 관장과 나만이 대관령으로 되돌아왔다. 

ㅡ 대관령 ㅡ                    
우리는 오후 3시경 버스를 타고 강릉을 떠나  대관령으로 올라왔다. 일망 청산무애의 절경이다. 넘어 내려갈 때는 계곡이 깊고 경사가 급하여. 위험하게 보였는데 넘어올 때는 구비구비 돌아 올라오는 험한 고개길이라 버스도 힘들어하는 것같았다.

대관령은 강릉에서 18km이며 높이가 832m의 고지 (高地)로 오대산 너머의 동해쪽으로 그 경사가 심하다. 옛날에는 대관령 너머의 강릉 지역을 명주(溟州) 또는 임영(臨瀛)이라고 했다. 대관령은 오대산 남쪽에 위치하여 명주군과 정선군 사이에 있는 큰 고개이다. 그렇게 때문에 서울에서 동해의 강릉이나 삼척 방면으로는 이 대관령을 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강원도로 통하는 이 준령은 말 그대로 한많은 대관령이었다. 아마도 강원도 정선아리랑은 이 대관령을 연상하고 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고가도로가 생기고 곳곳에 터널이 뚫려 대형차량이 직통으로 왕래하고 단축되었지만 1960년대만 해도 도로정비가 잘되어 있지 않고 구십구곡 (九十九曲)이라는 길고 험한 고개를 구비구비 돌아 내려가니 버스통행도 위험천만이었다.

이 까마득히 높은 대관령을 여름철에 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눈이 쌓인 겨울에 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은 사람 죽이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대관령에는 슬픈 사연의 일화와 전설이 많이 담겨져 있다    

어느 미련한 파계승이 꿈에도 그리던 규수와 결혼하여 세상 모르고 살다가 있는 돈 다 탕진하고 구걸하는 신세가 되자  처자와 헤어져 아들 하나를 데리고 눈덮인 대관령을 넘어오다가 그 아들이 얼어 죽자( 2 ) 눈속에 파묻고 나서야 인생이 허무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불교설화를  한국의 야담집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한국역사상 그 이름이높은 대관령은 그 이름과같이 일찍이 동방의 대철학자 율곡선생이 6살 때 어머니 사임당 신 씨의 손에 이끌려 험준한 대관령을 넘어왔다. 는 사실로서 더욱 유명한 것 같다. 이때 사임당 신 씨가 친정이 있는 강릉의 북촌 쪽을 바라보면서 지은 시 한수가 전해져 있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居情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靑山 (백운비하모청산)                               
백발의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나홀로 서울로 가야하는 외로운 이 심정
머리를 돌려 북촌을 바라보니 아득만 하고    
해점은 청산엔 흰구름이 날아 내리는구나.

옛날 동해의 강릉 지역을 임영( 臨瀛 ) 또는 명주(溟州)라고 했다. 강릉의 북촌은 사임당 신씨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사임당의 시는 여러 번역이 있으나 마음에 썩 닿지 않아 내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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