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정책과 조선총독의 고려대장경 간행 (3)
보스톤코리아  2014-11-03, 15:58:29 
2014-07-18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오대산 사고지의 답사에서는 사고지의 폐허로 별로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상원사에서 미나미총독때 인출한 고려대장경을 직접 보고 그후 그것의 인출과 전래과정을 조사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후 경성대학교 부속도서관의 사서관을 지낸 장지태선생의 말에 의하면 “미나미총독이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재인한 것은 중일전쟁( 中日 戰爭)이 일어난 1938년경” 이라고 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중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침략전쟁이었다고 하는 학자가 많다. 그래서 이글의 제목을 그들의 말대로  “ 일본의 침략전쟁과 대장경의 간행” 이라고 한 것이다.

미나미총독이 고려대장경을 인출한 것은 불교신앙에서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8만장의 방대한 대장경을 40여부나 재인하여  38본사에 한부씩 배부하고 자기의 고향인 도야마현에도 한부 보내고 또 만주국의 부의황제에게도 한부 기증했다고 한다.  본국일본은 중일전쟁에 돌입하여 국민총동원령을 내린  비상시국하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8만대장경을 재인하여 각 사찰에 배부한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없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해 미나미 조선총독의 정치적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진실하게 밝혀 서술하여야 한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라고 해서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면  오히려 상대방의 역사왜곡을 인정하고 미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모르고 압박과 설음을 당하는 것은 미개해서이고 알면서 침략과 착취를  당하는 것은  국력이 미약해서 이다.

제 7대조선총독 미나미지로 는 일본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중에 조선총독을 지낸 일본군의 대장이었다, 그는 일직이 일본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관동군참모와  조선군 사령관 그리고 육군대신을 지나 관동군 총사령관으로 있다가 1936년에 조선총독으로 왔다. 그래서 만주의 형편과 조선의 사정을 잘 아는 자이다. 미나미 조선총독이 일본의 침략전쟁중 식민지 조선통치를 어떻게 했는가를  밝히려는 것이 이글의 목적이다. 그와 관련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만주사변이다.

1931년7월 2일 만주의 장춘(長春)교외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조선농민을  중국농민들이 집단적으로 습격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다행이 많은 사상자는 나지 않았으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만보산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의 각신문들이  이 만보산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조선사람이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했다. 조선 각처에서 중국상인을 습격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보통학교 2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상급생이 모두나가자고 하여 멋모르고 동림시장으로 달려나가 중국인 만두가게에서 만두를 꺼내 먹은 생각이 난다. 이 만보산 사건은  일본군부가 중국농부들을 선동하여 그 곳에 이민하여 농사를 짓고 사는 조선농부를 습격하게 한 사건 이라는 것이다.

또 9월18일 에는 봉천(심양) 의 교외 유조호(柳條湖)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도 관동군 참모들이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서 연출한 것인데 중국군이 한 사건이라고 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그때는 중국사람이 만주에 있는 조선사람을 못 살게 학대하면서 여러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만 알았지 만주사변에 대한  일본의 침략계획은 전혀  알지 못했다.

 만보산 사건과 유조호 사건 이두사건이 만주사변의 주요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군사령관 하야시센주로 대장은 관동군을 도와야 한다면서 독단적으로 조선군을 만주로 출동시켰다. 보통학교 때이다. 전교생이 동림역에 나가 화물차의 곡간에 실려가며 “덴니 나와리네 후기워우쯔” 라는 군가를 부르면서 만주로 출동하는  일본군인들을  환송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봉천주재 일본총영사 “하야시 규지로” 가 본국의 “신데하라” 외상에 보고하기를  “유조호 사건은 관동군의 계획적 행동에 따른것입니다”라고 통보하여 들통이 났다. 어쨌든 이 두사건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게된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모두가 일본 군부애서 만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계획한 연출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유를 재만 일본인의 보호와 일본의 이권(남민주철도이겠다)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아니다.  

      그보다도 일본은 1905년 노일전쟁후 남 만주철도를 차지하면서 만주에 대한 야심을 키워 왔던 것이다.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의  유조호 사건을 구실로 즉시  봉천군의 군영인 북대영 (北大營)을 포격 봉천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만주군벌인 장학량의 가 정부가 있는  금주(錦州)를 폭격하여 점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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