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71
보스톤코리아  2015-03-09, 11:37:02 
현재 전세계적으로 수련되고 있는 우리의 고유무술이라는 태권도, 이 태권도의 뿌리, 즉 수련생들의 사범, 그 사범들의 사범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해방직후 개관한 초창기 5대관과 군대 태권도의 창시자 최홍희가 창설한 오도관과 함께 6대관의 범주를 떠날 수 없다. 이 6대관을 창설한 초창기 관장들이 무덕관의 황기만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에서 가라데(당수도, 공수도)를 배웠다. 창무관(YMCA 권법부)의 창시자 윤병인은 만주에서 중국무술을 먼저 접하고 일본으로 가서 가라데를 수련하였다. 황기는 만주에서 중국무술을 수련하였으며 가라데는 배운 적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제치하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껸 수련을 금지하고 전승하지 못하도록 심지어 고수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는데도 그들이 어렸을때 동네에서도 손쉽게 태껸을 접할 수 있었고 물론 수련도 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일제의 훼방으로 많은 태껸인들이 은둔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 수 또한 많이 줄었으며, 결과적으로 태껸이 체계적으로 전수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태껸인이었던 송덕기(1893 – 1987) 명인에 따르면 조선 시대 말기까지 태껸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였고, 지역마다 고유의 태껸이 있어서 그 지역의 비법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송덕기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성안 사람들은 ‘윗대’라 하고 성밖 사람들은 ‘아랫대’라 하여 자주 태껸꾼들이 시합을 했다고 한다. 
 
6대관장 중에서 최홍희는 어릴때 서당에서 훈장으로 부터 서도와 태껸을 사사하였다. 이것은 몇가지 시사하는 바가 큰데 무엇보다 신분에 상관없이 문무를 겸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황기를 제외한 나머지 관장들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전에 태껸의 수련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 가지 않았던 황기를 제외하고 모두가 가라데의 고수가 되어 귀국하였으며 해방을 전후하여 도장을 열면서 각자의 관館을 창설하였다. 결론적으로 초창기 6대관 관장들 모두가 우리나라의 전통무술인 태껸의 달인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의 외국무술의 고수였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태권도 뿌리가 일본이나 중국이라는 것은 받아드려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태권도는 결코 가라데나 쿵푸에 새로운 이름을 덮어 씌운 것이 아니다. 가라데 역시 일본 무술이 아니며, 만주 지방의 무술 역시 중국 무술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는 순수하게 독자적으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유사한 외래의 문화가 유입된 후 우리의 실정에 부합되면서 융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흡수되어 외형적인 실체가 사라지고 내용만 남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유입된 문화가 토박이 문화를 말살시키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 수련한 가라데(공수도와 당수도)와 만주에서 수련한 무술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고유의 무도철학에 접목되고, 고유무예와 자연적으로 교류되면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하고 독창적으로 기술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화되었다. 그리고 태권도인들의 열성으로 세계만방에서 우렁찬 기합소리가 우리의 기상을 드높여 준다. 

태권도라는 명칭 역시 우리의 무술인 태껸이 있었기에 창안이 가능하였다. 만일 ‘수박희’이란 무예의 명칭이 구한말이나 일제시대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면, 1군단 무술시범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아마도 “저게 바로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오던 ‘수박희’라는 거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냐면 이승만 대통령이 관람한 무술시범은 자신이 자라면서 보아온 태껸과 최홍희가 배워서 보급한 공수도(가라데)가 같았거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점에서 보면,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나라의 태껸이 중국으로 가서 권법이 되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가라데가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일본의 가라데는 오끼나와에서 전래되었으며 오끼나와 무술인 ‘테’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중국에는 그들의 무술이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며 그 큰 대륙에서 수 천년 동안의 크고 작은 제후들의 흥망성쇠속에서 자생한 무술이 없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문헌만 보더라도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중국과 또 백제는 일본과 많은 무예의 교류가 있었다.(삼국시대의 무술 – 고구려편, 백제편 참조) 그리고 인접한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자연적 현상이며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변형됨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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