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8
보스톤코리아  2015-07-13, 11:30:20 
조선연무관은 일본 유도 강도관의 조선 지부이다. 서울 소공동에 있었던 강도관은 우리나라 유도의 본산지이다. 갑자기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철수함에 따라 이 강도관 조선 지부는 주인없는 도장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유도인들에게 그 연고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당시에 종로구 수송동에서 도장을 가지고 제자들을 지도하던 유도계의 원로 이경석과 최영호, 강낙원 등이 불하받았다. 이것이 유도회관의 전신이다. 

말쑥한 정장으로 당시 ‘장안의 신사’라고 불리던 전상섭, 그는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였다. 당시 경신중학교(5년제)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이경석의 허락으로 도장의 절반 정도에 공수도부 간판을 내걸고 1946년 3월 3일 부터 관원을 모집하였다. 이것이 조선연무관 권법부의 시발이다. 전상섭은 학창시절 유도를 배웠고 일본으로 가서 동양척식대학에서 가라데(공수도)를 수련하였다. 그리고 1940년 귀국하여 경신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던 중 조선연무관(지도관의 전신)을 창설할 수 있었다. 그의 초창기 제자로는 관번1번의 배영기, 동생인 전일섭, 김복남 등이 입관하였고, 훗날 그의 ‘무통武統’을 이어 지도관을 세운 이종우도 20여일 늦게 입관하였다. 

조선연무관은 이렇게 서울에서 태동했지만 체계적인 발전은 전라북도 전주를 중심으로 하였다. 1947년 5월 17일 전일섭이 군산에 지관을 개관하면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전 호남지역으로 관세를 넓히면서 발전하였다. 전일섭에 의하면 초창기 5대 기간도장 중에서 지도관이 가장 먼저 지관을 열면서 지방 진출을 하였다고 한다(1945년에 창설된 무덕관은 전국의 철도국 건물에 지관을 열면서 전국적으로 무도를 보급했기에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누가 먼저인지 이견이 있다). 

1949년 전임사범으로 일본 유학파 윤쾌병(본명 윤희병)이 부임하였다. 그의 부임은 도장의 수련생들에게 특별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병리학을 전공하면서 가라데를 수련하였다. 그리고 부임 당시에는 7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단段 수로는 당시 우리나라의 무도계의 최고수였다. 일본 무술계를 주름잡았던 또 한 명의 가라데 실력자 조영주(재일 조선인청년단장 역임)도 귀국하여 합세하였다. 그들은 6.25가 발발할 때까지 조선연무관의 기반을 잘 다지며 우리나라 현대 무도계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무도 수련은 일본의 영향으로 품세위주의 수련과 약속대련이 전부였다. 소위 자유대련은 지도관의 경우 3대 관장인 이종우가 맡으면서 본격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초창기 조선연무관 권법부 수련생들의 연령대는 10대 후반이 대부분이었고, 20대 초반과 30대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태권도사史나 무도사를 보면 ‘권법부’라고 적고, 당시의 수련생들의 증언으로는 ‘공수도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하는데, 1946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당수부’라고 기록했다.128) 
5대 기간도장 중의 하나인 창무관의 창시자 윤병인과 창무관의 관장을 지낸 이남석도 초기에는 조선연무관에서 수련하였다. 그리고 윤병인은 YMCA에서 권법부를 만들어서 지도하면서 창무관의 창시자가 되었다. 창무관의 관명은 6.25 이후에 이남석과 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YMCA권법부’에서 개명하였다. 
조선연무관의 창시자 전상섭은 6.25때 납북되었고 그 후 윤쾌병과 이종우가 주축이 되어 지도관으로 개명한 후 윤쾌병이 2대 관장, 이종우가 3대 관장을 지냈다.

128) 동아일보에 난 기사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제목 “唐手進級者發表”, “朝鮮硏武館唐手部에서 지난七月一日부터 同二十日까지 冒暑修鍊을 맛치고 第一回審査結果 다음의 十五名의 進級을 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중급과 초급으로 나누어 명단이 나와있다. 거기에는 관번 1번의 배영기, 전상섭의 동생이며 후일 호남지방에서 지도관의 지관을 열어 그 지방의 무도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전일섭, 그리고 3대 지도관 관장을 지낸 이종우도 보인다. 일개 도장에서, 물론 당시에는 우리나라 현대 무도의 뿌리가 되는 기간도장, 하계훈련을 하고 승급심사를 본 결과를 중앙의 일간지가 기사화 했다는 것은 당시의 무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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