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9
보스톤코리아  2015-07-20, 14:53:35 
태권도계의 ‘살아있는 전설’ 노병직, 그는 아직 생존해 있다.125)  태권도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원로 노병직은 96세로 미국(미네소타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1919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가라데(당수도)의 창시자 후나고시 기친(船越義珍)의 송도관(松濤館, 쇼도칸)에서 배웠다. 그는 1936년 부터 귀국할 때까지 수련하였다. 그리고 1944년 2월 귀향하여 개성시 자남동에서 ‘공수도 송무관’이란 이름으로 도장을 열고 제자들을 지도하였다.126) 그는 이원국이 청도관을 창시하면서 같은해 9월에 개관한 도장이 우리나라의 최초의 도장이라고 인정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같은 도장에서 같은 시기에, 아마도 같이 수련했으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로가 거의 한 세기를 살면서 또 유학과 우리나라 무도계의 비조로서 인생의 행로가 미국이민까지 겹쳐진다. 두 원로의 애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노병직의 증언을 통해서 많이 볼 수있다. ‘태권도 저널’(2014년 9월 24일자)에 실린 그의 증언을 보면 노병직은 이원국을 무도인으로 인정하는 것 마저도 주저한다. 

“1955년 청도관 고문 겸 명예관장으로 영입된 최홍희 장군은 고위 장성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을 청도관 고문 또는 이사들로 끌어들여 청도관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국 씨가 최 장군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 이원국 씨가 1950년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말은 6.25때 북괴에 부역을 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비굴한 잔꾀이다. 이원국 씨는 46년 부터 50년 6.25동란까지 4년간 당수도계에 있었을 뿐이다. 그 후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국내 태권도계와 관계를 맺지 못했고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과거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언행은 무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마치 협잡꾼이나 일삼는 작태라고 생각한다.”

노병직의 송무관 창설과 도장 개관이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개념의 최초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연유가 있다.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여러가지다. 그러나 그 여러가지가 허위라기 보다는 일본 유학 중 방학을 맞아 귀향하여 여기저기에서 가르친 것이 정확한 기록없이 구전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노병직 자신이 밝힌 송무관 창설 비화는 1936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배운 가라데를 방학을 맞아 집으로 와서 당시 일제 식민지하의 의기소침한 후배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서 가르치다가, 1944년 완전히 귀향하여 친구들과 후배들의 간청에 의하여 지도하기로 하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개성시 중앙부의 자남동 소재 관덕정이 좋겠다는 의견에 허가서를 내었다(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5인 이상의 모임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가라데를 가르친다니까 금방 허가가 나왔다고 했다). 그 해 3월 시작할 때는 약 10여명의 관원들이 있다가 젊은이들이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관원들이 없어져서 교습을 중단하고 다시 1946년 5월에 송무관을 재발족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에는 창립1주년 기념대회를 송도대강당에서 개최한다고 되어 있어 대외적으로 알려진 송무관의 공식적인 개관은 1947년 11월경임을 알 수 있다.127) 

또 다른 대목의 이원국과의 애증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해방 후 자신이 개성에서 도장을 차리겠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의 이원국이 제자(손덕성, 남태희)들과 개성을 방문하여 ‘송무관’이란 명칭을 지어주었다는 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전쟁과 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된 자신의 고향, 그래서 그는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관세를 확장하면서, 6.25 동란이 일어난 후 이원국이 없는 청도관을 많이 지원하여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는 제4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했고, 국제태권도연맹의 부총재도 역임했다. 198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네소타 주에 거주하고 있으면 태권도의 보급, 발전의 공로로 2014년 9월 국민훈장(모란장) 받았다.
    
125) 생존한 사람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라도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고, 또는 불편한 진실들이 나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6) 노병직의 주장이 맞다면 그의 도장이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개념의 최초의 도장이다. 다른 기록에는 1944년 3월 개성시 동흥동에 개관했다는 기록도 있다.(태권도 저널, 2014년 9월 24일, 서성원) 현재 무도계에서 인정하는 현대적 개념의 최초의 도장은 청도관의 이원국이 1944년 9월 15일에 서대문구 옥천동에서 개관한 도장이다.
127) ‘관 중심으로 본 태권도형성사’ 허인욱(2008)에서 재인용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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