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3
보스톤코리아  2015-08-19, 12:12:10 
우리나라의 태권도는 유난히 정치바람을 많이 탔다. 현재도 정치인(국회의원 김태환, 2014년7월 국회법 개정에 따라 겸직을 할 수 없다)이 수장을 맡아서 이끌고 있다. 초대 회장 채명신부터 현 26대 회장들의 면면을 보면 순수 태권도(무도)인은 4대의 노병직(송무관 창시자)만이 유일하고, 군軍에서 청도관 출신들의 도움과 그들을 주축으로 하여 오도관을 창설한 최홍희가 다음이고, 그는 자칭 ‘태권도의 아버지’ 라 부르며 군에서 태권도를 보급시켰다.133) 김운용은 고교시절 수련한 기록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나머지는 군인과 정치인이었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인맥이 얇은 순수무도인으로는 태권도를 거국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한계를 느낀 태권도인들은 스스로가 유능한 외부인사들을 영입하자는데 암묵적인 지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5.16군사정변 후에는 채명신장군을 ‘이용’하려고 그를 영입했는데 태권도인들의 바램에 미치지 못한 활동으로 다시 태권도인들이 수장을 맡았다. 그리고 공화당 정권하에서 청년분과위원장을 지낸 김용채를 1967년에 영입하여 태권도의 발전을 활성화하였다. 국고의 지원과 함께 넓은 그의 인맥으로 태권도협회의 성장을 위한 기초를 잘 마련하였다. 거기에 자신감을 얻은 태권도인들은 1971년 김운용에게 접촉하여 회장직을 제의하였다. 청와대 경호실을 거쳐 학술원 원장으로 있던 그는 ‘상부’의 허락을 받고 태권도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134) 

김운용은 태권도계에서 많은 관계자들로 부터 박정희 전대통령에 비유된다. 박정희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이중적이듯 김운용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인 시각이 오간다. 박정희가 ‘내가 아니면 한국을 다스릴 수 없다.’는 뒤틀린 확신으로 경제 발전의 초석을 놓아 국민들을 ‘보릿고개’에서 구해냈듯 김운용 또한 ‘내가 아니면 태권도를 세계화로 발전 시킬 수 없다.’는 나르시스틱한 감상으로 그의 자만심을 키우고 외적인 성장만큼이나 내적인 부패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특히 초창기 국기원 설립과 세계태권도연맹(WTF) 창립, 그리고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등 그의 공적은 그만이 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는데 인색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박정희가 18년 동안 장기 독재를 하면서 민주주의 발전을 억압했듯이 김운용도 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많은 외형적인 업적을 쌓으면서 ‘태권도 황제’로 군림했지만 태권도 내부에 쌓인 ‘갈등의 골’(운영의 민주화, 국가대표선발의 문제점, 불투명한 재정, 인사불평등 등등)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러다 결국 그는 2005년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마지막 보루堡壘로 잡고 있던 IOC위원직 마저 사임하였다.(김재규의 의도가 어떻든 10.26 사건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김운용의 퇴진 후 과연 태권도계의 민주화는 이루어 졌는가?) 

대한태권도협회가 창립된지 10여년이 넘게 활동하였지만 1970년 초까지 기간도장(무덕관, 청도관, 지도관, 송무관, 창무관 등 초창기 5개관) 뿐만 아니라 후일 파생된 신생관館 등 여러 유파가 난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종우(지도관)는 엄운규(청도관)와 함께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했던 김운용의 정치력을 활용해 태권도계를 정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그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김운용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고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한태권도협회의 중앙도장을 역삼동에 건립하고, 그곳에서 세계태권도인들의 공인단증을 발급하는 ‘국기원’을 창설하였다. 즉 당시까지 모든 태권도인의 꿈이었던 ‘중앙도장’이 서울 변두리 허허벌판 한가운데 작은 언덕위에 세워졌다. 부지는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이 역삼공원의 일부를 기증하였고, 자재는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부탁하면 여러 업체에서 무상으로 지원되었던 시절이었다.   

133) 이종우는 최홍희를 태권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종우에 의하면 “그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요. 답변할 가치도 없어요. 천하에 못된 자가 그자에요. 모르는 사람은 최홍희를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그거 아주 쓸개 빠진 자입니다. 최홍희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아요.”(신동아 2002년4월호, 육성철 기자의 질문에)
최홍희는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수련하였으며, 군대시절 자신만의 태권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초창기 우리나라 태권도 발전을 위하여 최홍희와 이종우는 많은 접촉과 교분이 있었다. 특히 1960대를 지내면서 대한태수도협회, 대한태권도협회, 국제태권도연맹(ITF) 등의 단체을 통하여 서로 간의 의견차가 나중에는 반목으로 충돌하면서, 최홍희의 망명과 전향 그리고 세계태권도연맹 (WTF)이 지구촌의 태권도를 천하통일하면서 그들은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134) 김운용은 태권도의 고수는 아니지만 경동고등학교 재학시절 태권도(공수도)를 배웠다.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창무관을 창설하고 경동고에서 체육교사를 한 윤병인 관장으로부터 배웠다. 나중에 지도관 관장 이종우로부터 6단을 받았고, 태권도인들은 그를 ‘명예10단’으로 별명을 붙여주었다. 단증의 발급여부는 의문이다. 당시 김운용이 국기원 원장으로 재임했었는데 자신에게 발급하진 않았으리라 본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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