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7
보스톤코리아  2015-09-14, 12:21:07 
1978년 제42회 국제사격대회를 성공리에 마친 우리나라는 올림픽도 개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1979년 ‘국민체육심의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의견을 나누었지만 박종규 사격연맹회장만 찬성하고 최규하 국무총리 이하 모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그 ‘꿈’은 일장춘몽으로 끝나는가 했는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또 다시 논의 되었고, 국민의 단합과 국위선양 그리고 대외적인 홍보에 있어서 올림픽 보다 더 바람직한 범국민적 행사는 없다고 판단되어 다시 적극적으로 검토하였다. 김운용의 회고에 의하면 올림픽 유치 대표단은 어디서 부터 무엇을 시작해야하는지 유치자금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하는게 적절한지도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고 한다. 

반면에 같이 신청한 일본의 나고야 유치단은 도쿄올림픽과 기타 국제대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치 가능성이 우리보다 멀직히 앞서가고 있었다. 당시 국제 스포츠계에서는 나고야가 압승할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대다수의 언론도 그렇게 보도하곤 하였다. 사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컬러 TV도 없는 상태였다. 과연 ‘한국에서 인공위성과 국제방송센타를 연결해서 전 세계로 실황을 중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뿐만 아니라 제반시설과 설비, 운영의 기술은 뒤받침하는가? 등의 수 많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의 준비, 설치, 경기운영능력 여부에 관한 융단폭격 같은 질문은 개발도상국 코리아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범국민적인 성원과 준비위원들의 ‘밤잠없이’ 노력한 결과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고 52대27로 완벽한 승리, 우리는 1981년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으키며 ‘88서울올림픽’ 유치를 하였다. 유치준비위를 구성한지 불과 2년만의 일이다. 그후 올림픽조직위원회는 노태우와 박세직이 이끌면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중견국으로 부상했으며 이제는 당당히 선진국들과 함께 세계를 주도하는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국제경기의 주최 경험이 거의 없던 우리나라가 세계사격대회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1988년의 서울올림픽 유치권을 따낸 것을 우리는 흔히들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김윤용은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승리는 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승리를 움켜질 수 있는 필연적인 우리의 노력이 있었다.”(세계를 향한 도전, 2002)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한 주역들의 면면을 보면 노태우,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IOC 로부터 올림픽훈장 금장 수여)을 비롯하여 조상호, 김종하, 김옥진, 최원석, 이건희(올림픽훈장 은장 수여) 그리고 정주영과 현대그룹이다. 성황리에 끝난 올림픽은 전두환 정권의 의도대로 국민의 단합과 국위선양에 한 몫을 하였다. 물론 반대한 국민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세계 스포츠제전의 꽃인 올림픽을 우리도 해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당시 야당의 정치인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 인지는 몰라도 여러 구실을 잡고 반대를 하였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야당 총재들을 직접 만나서 올림픽의 중요성을 설명했을 정도로 개최반대 또는 남북한공동개최 등 많은 이견들도 있었다. 

평화와 화합의 상징인 인류의 스포츠제전 올림픽은 서울 올림픽 전까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었다. 1984년의 LA올림픽의 공산진영의 보이콧, 1980년의 모스크바올림픽의 서구진영 보이콧 등으로 반쪽 올림픽 경기가 치루어졌고, 그 전의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 역시 아프리카의 36여개국이 불참하면서 이어져온 국제정세는 올림픽의 무용론까지 대두되기 까지하였다. 사마란치가 IOC위원장 직으로 처음 치르는 1988년의 올림픽은 그에게 많은 과제를 부여하였다. 이념적으로 분단된 동양의 반도에서 개최하기로한 결정은 무엇보다 사마란치의 의중이 가장 영향력이 있었으며, 그 역시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의 진가를 입증하려고 최대의 승부수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입지를 넓히면서 영향력을 키운 김운용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포츠의 거목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후 그는 태권도 뿐만 아니라 1997년의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와 부산 동아시아 경기대회, 1999년의 강원도 동계 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및 한일월드컵, 2003년의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등을 유치하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우리나라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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