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34
보스톤코리아  2016-06-13, 11:43:38 
제3세 풍월주 모랑은 일찍죽은 관계로 그에 대하여 남겨진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대역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寶果公主와 더불어 사통을 했다. 후에 보과공주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모두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진부未珍夫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태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9년(548년)에 태후가 명하여 3세 풍월주로 삼아 남모南毛의 혼백을 위로했다. 위화랑공이 그의 딸 준화俊花를 처로 삼게 했으니, 곧 이화랑의 누나(女兄)였다. 모랑은 딸인 준모俊毛 한 명을 낳고 일찍 죽었다. 마침내 이화랑이 뒤를 이었다.
찬하여 말한다: 동성왕의 아름다움이여 위화랑의 사위이다. 대왕의 아들이고 태후의 사랑이다.]

법흥왕이 국공國公의 신분으로 백제에 들어가서 보과공주와 사통한 시기는 대략 479년에서 500년으로 본다. 당시 신라는 비처왕(소지왕, 재위기간 471 ~ 500년, 즉위 초에는 현명한 군주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나중에 변방 날이군에 살던 벽화의 미모에 현혹되어 경주에서 영주까지 변복을 하고 다니면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왕궁으로 데려왔지만 왕은 여전히 정사政事는 소홀히 하고 정사情事에만 몰두하다가 500년 부군파副君派, 즉 지증왕계에 의해 폐위 살해된 것으로 본다)이 왕좌에 있었고, 법흥의 아버지 지증왕은 부군副君의 지위에 있었다(부군은 차기 왕이고 국공은 차차기 왕를 일컫는다. 지증왕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옥경이 가장 큰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려 1자5치의 크기다. 그리고 어렵게 구한 왕후의 키는 자그만치 7자5치다). 백제의 동성왕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살다가 479년에 전왕 삼근왕이 피살되면서,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진씨眞氏들에 의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501년, 재위 23년 겨울에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 머무르던 중 위사좌평衛士佐平(현재의 경호실장) 백가가 정변을 일으키면서 왕을 시해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였을 때 신라가 원병을 보내 지원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사이가 좋은 시절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14년, 553년)에 보면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 왕녀에게 장가들어 작은 왕비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시에 같은 사서(백제 본기 성왕31년, 553년)에 “겨울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백제의 성왕 딸이 신라의 진흥왕에게로 시집을 갔다(소비 부여씨, 성왕의 딸). 당시 진흥왕 시절에는 나제동맹이 깨어지고 서로가 적대관계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국토는 진흥왕 말기의 지경地境으로 확장되지도 않았으며 국경의 성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계속되는 전쟁의 시기였다. 그래서 왕실을 점령당한 적이 없었기에 ‘화해나 전리품’ 성격의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계미년(503년)의 기록을 계유년(553년)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화랑세기 필사본의 기록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적대관계에 있던 진흥왕 시절 보다는 동맹관계에 있었던 소지왕 말엽이나 지증왕 초기에 국공 원종(후에 법흥왕)이 백제로 가서 보과공주와 사통했다는 기록이 당시의 대외적인 큰 그림에서 보았을 때 더 적합하다고 본다. 

그리고 후에 보과공주가 신라로 와서 딸 남모와 아들 모랑을 낳았다. 남모는 준정과 함께 최초의 원화였다. 그러다가 준정의 시기와 질투로 준정으로 부터 살해 당했다. 당시 남모는 2세 풍월주인 미진부공의 부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후손이 없다. 미진부공이 2세 풍월주가 되고나서 남모의 동생인 왕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모랑은 지소태후(진흥왕의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으며, 1세 위화랑공도 모랑을 좋아하여 자신의 딸 준화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리고 지소태후는 모랑으로 하여금 화랑도를 이끌면서 누이 남모가 못다하고 간 위업을 이루고 그의 혼백을 위로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3세 풍월주가 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준화와의 사이에서 준모라는 딸을 하나 남겨 놓고 일찍 죽었다. 그리고 위화랑의 아들 이화랑이 4세 풍월주가 되었다. 이 이화랑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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