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6) :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보스톤코리아  2010-10-04, 11:28:03 
연변에서 근심하는 조선의 농사
필자의 고향인 중국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에게 제일 심각하게 들리는 정보가 조선의 식량난이다. 조선의 식량난은 한해, 두해의 일이 아니고 이제는 20여년도 훌쩍 넘게 지속해오고 있는 문제이다. 연변지역에 자연재해가 들면 사람들은 오히려 조선의 농사를 더 근심하곤 한다. 지리적으로 가깝기에 연변에 자연재해가 들면 당연히 강너머 조선에서도 비슷한 자연재해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연재해가 들어도 연변에서는 기근까지는 근심하지 않는데 조선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조건도 비슷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분명 다 같은 민족인데 한쪽은 20여년전에 이미 보릿고개를 넘겼고, 한쪽은 아직도 애달픈 굶주림을 면치못하여 외부의 식량원조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20여년전까지는 연변이나 조선이나 식량조건이 그리 차가 나는 것이 아니어서 연변의 농가에서는 겨울에는 강냉이죽으로 하루 두때씩 떼우고, 봄에는 양식이 모자라 배급을 받는 도시의 사람들한테 가서 강냉이나 조를 꾸어다 가을에 쌀로 되갚는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경부터 연변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부터 나는 연변을 떠나 장춘에 가서 대학교에 다녔는데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집에 돌아오니 올해부터는 강아지에게 남은 밥을 먹이고 있고, 창고에 콩기름이 큰 통 하나에 들어있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어쩌면 1년사이에 이렇게도 큰 변화가 생긴다는 말인가. 정말 믿기 어려운 변화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인민공사(人民公社)의 생산대(生産隊)에서 한 가족이 한해 분배받는 콩기름이 겨우 유리병으로 두병(2kg정도)밖에 안되어 집에 손님이나 와야 기름맛이라도 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양식사정도 항상 여의치 않아 쌀밥을 마음 껏 먹어볼때가 별로 없었다.

가족도급제가 바꾼 중국 농촌
1982년의 연변 농촌의 제일 큰 변화는 사회주의 집단농장제인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사실상 해체되고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토지소유는 국유이지만 땅을 가족별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개인이 영농을 할수 있게 한 것이다. 생산책임제라고 불린 이 농업정책으로 중국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보릿고개란 말이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가족도급제에 의한 개인영농이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생산량으로 나타났기에 가족도급제는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연변에서 가정도급제가 실시되던 수년간 농가 사람들은 한뙈기라도 논과 밭을 더 다루려 애쓰고 서로 경쟁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다. 마침 하늘도 도왔는지 중국의 농촌은 자연재해 없이 수년간 대풍년을 맞이하였다. 이 때부터 농촌에서는 다각경영을 하여 연간수입이 인민페로 만원을 넘기는 부유한 농가 ‘만원호’ 가 속출하기 시작하였고, ‘향진기업’이라 불리는 농촌기업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창도한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실상 농촌의 체제개혁에서 시작되었고, 그 것이 오늘의 중국을 번영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의 농촌에서는 80년대에 보릿고개 문제를 기본상 해결하였던 것이다.

실패로 끝난 인민공사
그러면 그 이전의 인민공사 체제하의 집단영농은 어떠하였는가?
사회주의 체제하의 중국 농촌에서 합작사란 이름의 집단농장제가 실시된 것이 1953년부터이다. 1958년부터 합작사의 집단농장 체제를 보다 강화한 인민공사가 성립되고 ‘대약진’이라는 극좌적인 사회운동이 수년간 진행되었다. 이 ‘대약진’ 기간에는 농촌의 가정에 식량이 배급되지 않고 인민공사의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하는 극단적인 방식이 실시되었는데 그 당시 중국전역에서 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속촐하였고 연변에서도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철이 들었던 70년대에도 연변의 농촌은 인민공사의 체제하에 전적으로 정부의 방침과 동원에 의한 영농이었다.

봄이면 6월중순까지 모내기를 끝내라는 정부의 지침이 층층이 회의를 통하여 전달되고, 학생들과 도시의 노동자들을 총동원하여 모내기를 도왔다. 그래도 기한대로 모내기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어느 산지가 많은 지역의 다락밭이 전국농촌의 모델로 인정되어 전국적으로 다락밭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 연변에서도 멀쩡한 땅을 파헤쳐 다락밭으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베트남의 경우도 중국과 비슷한 집단농장제를 실시하였다가 실패로 인정되어 개인영농제로 바꾼 경험을 갖고 있다. 북부베트남에서는 1960년부터 농촌의 합작사를 시작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룬 후 북부베트남의 집단농장제를 남부에도 실시하였다가 그 실패가 인정되어 1988년부터 전국농촌에서 생산물책임제에 의한 개인영농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 이듬해부터 베트남은 쌀 수출국이 되어 농촌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를 과시하게 되었다.
중국과 베트남의 집단농장제가 기본상 실패하고 개인영농제가 성공한 실례를 보면, 농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이 땅의 주인이 되고, 농민들의 노동의욕과 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에도 농업체제의 개혁이 필요
해마다 주요한 농사철마다 조선에서는 학생들과 노동자, 군인들이 농사일에 동원된다는 뉴스가 종종 들린다. 정부에서는 해마다 식량생산 얼마라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인민들을 동원시킨다. 그러고도 식량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보고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에서 이미 실패를 인정한 집단농장제를 해체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 식량난의 근본원인이라 생각된다. 결코 비료가 모자라거나 생산설비가 따라 못가는 문제만이 아니다. 과감한 발상전환에 의한 농업체제의 개혁을 조선에 진심으로 바라는바이다.

김광림
Professor, Niigata Sangyo University
Visiting Scholar, 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Harvard Univesity
E-mail:guanglin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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