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일본상인 탐구
보스톤코리아  2012-03-05, 11:45:32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158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천하를 통일한 후,그해 9월1일부터 오사카성을 짓기 시작했다. 천하를 통일 한 후 자기가 살 집을 짓는 것이었다. 천하의 주인이 된자가 살 집이니 그 크기도 역사상 일본 천하제일이었다.

성은 일사천리로 지어져 그 3년후인 1586년 8월8일 오사카 성이 완공되고 토요토미는 거기에 입주했다. 이것이 오늘날 오사카의 명물이 된 오사카 성의 출발이다.출발이라고함은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성을 헐고 그 자리에 다시 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을 지은 것은 오사카를 일본 통치의 거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토요토미는 천하를 통일하기 전 이미 슨부성(駿府城)을 지어본 경험이 있었다. 당시 오사카 성은 규모로만 보면 가장 컸다.

그 이유는 자기 권력의 절대성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 였다. 당시 3년 동안 동원된 인력은 10만여명이었다. 오사카가 일본경제의 중심이었던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그 역사는 멀리는 한반도의 백제와 교역을 하던 서기 600년대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으로 오사카가 상인의 도시가 된 것은 158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부터다.

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성이 있는 오사카를 사실상 일본의 수도로 만들고 싶어했다. 당시 일본의 수도는 교토였지만 교토보다 몇배 더 큰 신도시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교토에는 천황이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권력은 천황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손아귀에 있었다.

천황은 허수아비였다.
비록 천황이 허수아비였으나 천황아래에는 수 많은 신하와 귀족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천하 제일의 상인이었던 교토 상인들이 있었다. 모든 물산은 교토에 집하되었으며 교토의 상인들은 천하의 물산을 주무르고 있었다. 경제력의 중심이 교토에 있었던 것이다.

천황보다 한수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천황을 옹립하는 제후들을 무럭화 시키고 천하의 경제가 자기 손아귀로 들어올수 있도록 정책을 펴 나갔다.

그 첫 번째가 천황이 살고 있던 어소보다 더 큰 오사카 성의 건립이었으며 두 번째가 천하의 물산이 오사카로 집하 되도록 하는것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본래 바늘장사 출신인데다가 전쟁을 치루면서 상인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는 말처럼 토요토미는 자신이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서 상인의 재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하카다의 대상인 카미야(神屋)에게 다회를 베풀면서 그에게 협력을 구했다.

카미야는 하카다의 대상인일뿐 아니라 해운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물자와 배를 빌리지 않고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엔 <밖에서는 사무라이,안에서는 상인>이라는 속담이 있었다.
사무라이가 세상의 권력을 다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인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었므로 상인의 힘 없이는 천하가 굴러가질 않았다.당시 겉보기엔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그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외형적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순으로 사회지배구조가 짜여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상(商)-사(士)-농(農)-공(工)의 순이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상인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찍이 터득한 장군이었다.

전쟁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않고서는 승리할수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오다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슨부성을 지을 때 성의 축조야말로 상인의 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성의 축조는 단순히 장군의 명령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건축,토목,수리,역학등의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므로 천하의 기술자가 필요하고 막대한 양의 돌, 나무, 기와, 흙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운반할 노동력이 따라야 했다.

하루에 수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어야했고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데도 막대한 군량미와 인건비가 필요했다.

이러한 모든일은 돈이 없이는 불가능했고 그 돈을 댈수 있는 사람은 재력있는 상인들이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오다노부나가의 눈에 든 것은 슨부성을 일사천리로 무리없이 지었기 때문이다.

오사카성을 완공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천하의 상인을 오사카로 끌어모은다.

천하의 물산이 오사카로 집하되고,그것이전국으로 유통되어 오사카가가 천하의 경제의 중심이 되기위해서는 유능한 상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 4대 상인을 끌어모으다
당시 일본에는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큰 상인들이 많았다.

교토의 후시미(伏見)상인, 시가(滋賀)현의 오미(近江)상인,오사카의 히라노(平野) 상인,고후(甲府)상인,큐슈의 하카다(博多)상인, 사카이(堺)의 사카이 상인, 기슈(紀州:오늘 날의 이세지방)의 마쓰자카(松阪)상인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각지 지역에서 장사를 하면서 수백년 상업의 노하우를 꿰뚫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상인들이었다.

후시미 상인,오미 상인,히라노 상인, 사카이 상인 등은 뒤에서 설명하므로, 그 외의 상인들에 대해 설명하면,
고후는 도쿄의 서북쪽으로 기차로 1시간30분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고후상인은 예부터 근면으로는 일본 내 제일로 알려져있다.

고후 출신 중에 가장 대표적인 상인 중의 한사람을 꼽으라면 멀리 갈 것도 없이 도쿄전력과 도쿄 가스,JR동일본(동일본 철도)의 오너가 된 와카오 스바효(若尾逸平)일 것이다.

1800년대 고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0대때부터 천평봉을 메고 복숭아 행상을 시작한 그는 거기서 번 돈으로 외국인을 상대로 털실 장사를 했다.

그가 털실장사를 할 무렵인 1871년 일본에는 도쿄와 요코하마 구간에 철도가 놓여졌는데,기차가 달리는 광경을 보고 그는 언젠가 저 철마의 주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털실을 팔아 이익이 난 만큼의 돈을 가지고 당시의 도쿄마차철도(훗날 동일본 JR),도쿄전등(훗날 도쿄전력), 도쿄 가스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경영권을 획득, 세회사의 오너가 되고만 입지전적인 인물이 그이다.

그처럼 고후 상인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대기업의 총수가 되는 입지전적 자수성가형이 많은데, 그들의 재산은 오직 근면성실이었다.

이것은 와카오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고 고후 상인들의 특질이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일본내에서는 고후 상인을 가리켜 탐욕스럽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런 비난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목적을 위해서 천평봉을 메고 앞을 향해서만 가는 스타일이다.

이것은 와카오 이전의 고후 상인들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산악지대인 고후인 요양지로서는 적합하지만, 먹고 살기에 좋은 고장은 아니었다.

기후가 차기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아 고후사람들은 일찍이 외지로 복숭아 장사를 나갔다.밑천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의지한 건 천평봉에 담긴 복숭아와 오직 돈을 벌겠다는 일념, 그리고 근면함밖에 없었다. 그러한 무서운 근검절약과 근면함이 고후상인의 전통인 것이다.

하카다 상인은 무역상인들이다.
하카다 즉 오늘날의 후쿠오카는 이미 1천여년 이전부터 한반도와 중국과의 교역을 시작한 무역창구였다.
그들은 선박을 가지고 해로를 개척한 상인들로 꼽힌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때 바로 그들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은 해운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기슈는 오늘날 미에(三重)현의 이세(伊勢)지방을 말한다.

그곳 상인은 칠기, 옷칠 행상으로 유명했다.

일본은 예부터 칠기가 유명한 나라이다.일본이라는 국호, 즉 영어의 재팬도 칠기라는 뜻에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칠기밥그릇을 둘러메고 전국방방곡곡의 행상을 다녔는데,그들의 장기는 월부판매였다.

일본에서는 최초로 1800년대에 월부판매제도를 만든 상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봄에 칠기그릇을 일단 주고, 다달이 돈을 받아가거나, 분기별로 받거나, 추수 후에 받는 방법으로 그들의 매출을 늘려나갔다.

요즘에는 별로 새로을 것이 없는 방법이지만 200년전에 이미 그러한 판매방식을 가졌던 기슈상인들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월부판매의 발상지>인 기슈를 상인정신의 한 전범으로 여기고 있다.

기슈출신 중에서 대표적인 점포는 포목점 에치고야(越後屋)인데,그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 4대재벌 그룹 중의 하나인 미쓰이(三井)그룹의 출발이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그 중에서 교토의 대표적인 상인인 후시미상인과 오미상인, 오사카의 히라노상인과 사카이의 사카이상인을 성 아래에서 살도록 집단이주시켰다.

이들이 살던 지역은 오늘날 오사카의 중앙구 본정통일대인데 이 지역을 가리켜 센바(船場)이라한다.

센바란 선착장을 말한다.

오사카는 운하의 도시이다.

천하의 모든 물산들이 바다나 강을 통해 오사카로 올라오면 그것들은 다시 운하를 통해 센바에 모였다. 바로 그 센바 지역에 천하의 물산이 모였고 천하의 상인들은 그 물건들을 오사카 성이나 교토,그리고 전국에 보냈던 것이다.

토요토미에 의해 1580-90년대에 오사카에 정착한 이들은 그후 오사카를 물산의 중심, 상거래의 중심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오늘날 상인의 도시 오사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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