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일본상인 탐구
보스톤코리아  2012-03-12, 12:37:22 
제 3회 비단장사 후시미(伏見)상인
교토에서는 3대 이상을 교토에서 살지 않은 사람은 교토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교토의 물과 공기를 3대쯤 마셔야 교토사람으로 본다.

교토상인은 유별나다.1200년간 일본의 수도였다는 유별난 자존심이 있기도 하지만, 상인의 정신이 가장 투철한 사람들이 바로 교토사람들이다. 교토에서는 지금도 창업 100년 정도 된 가게들은 가게로 취급해주지 않는다. 여타의 지역에서 가게의 창업년도를 전쟁 전이냐 전쟁 후냐로 구분하는 지역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다른 지역에서 1945년 2차세계대전 전이냐 후냐를 구분하는데, 여기서는 기준자체가 틀리다. 백년, 2백년 역사 정도가지고는 아예 가게 취급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교토에는 3, 4백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점포가 즐비하고,현재 2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점포가 1600개가 영업중에 있다.
그들은 계승문화를 중시한다.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파격을 두려워한다.

교토에는 5대 하나마치(花町)가 있다.
하나마치는 요정거리를 말한다. 기온 히가시, 기온 코부, 혼토쵸, 카미시 치켄, 미야가와초 등이 그것이다.이곳 요정에서는 요리값과 화대 등 그날의 유흥비를 모두 요정에서 손님대신 치루고 나중에 손님이 지불하는 시스템을 하고 있다.

수백년간 이어온 전통이다. 그날 유흥을 대접하는 사람이 손님이 보는 앞에서 계산하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그날의 술값은 나중에 계산한다.이것은 손님과 업소간의 신용을 담보로 한다. 따라서 하나마치의 손님이 되려면 재력은 물론 신용이라는 자격이 필요하다.

실제로 교토의 유명한 요정인 일력(一力)의 경우도 철저한 멤버쉽(회원제)으로 운영한다. 회원이 되려면 회원 중 최소한 한사람의 추천이 필요하다.

또 회원의 자격도 있다. 대학에서는 총장급, 대기업은 사장급 이상,공무원은 장차관급, 정치가는 국회의원, 예술가는 노벨상 수상자 등이다.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모이므로 후불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교토사람들이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교토사람들은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촌스런 행동으로 본다.

<오차 쯔케를 드시겠습니까> 라는 말은 <이제 그만 돌아가달라는 뜻>이다.
오차쯔케는 밥을 간단히 물에 말아 먹을 때 거기에 뿌리는 대용식이다.

겨자가루에 김,약간의 과자가 들어있다.간단한 음식이다. 이런 음식을 손님에게 내놓은 것은 사실상 모욕인데 그걸 내놓음으로써 그만 돌아가 달라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고맙다는 표현도 상대의 표정을 잘 보고 판단해야한다.고맙다는 표현이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혀 부정적일때도 있기 때문이다.싫어하면서도 고맙다고 둘러서 표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얼굴엔 미소를 띄면서 고맙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양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토는 다분히 귀족취향이다.
바로 그러한 교토상인 중의 한 부류가 후시미 상인이다.

후시미는 오늘날 교토의 구(區)이다.
한때는 후시미시였으나 지금은 28만8천명의 인구를 가진 구로 격하되었다.

1594년 후시미성을 신축할 건축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후시미 항이 개항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후 오사카, 나라(奈良),오미(近江) 등 인근 대도시에서 운하를 통해 교토로 올라오는 모든 물산이 여기에 집하되었었다.

당시 후시미 항에는 막부가 공인한 <30석선>과 <20석선>이 주로 통행했는데,<30석선>이란 쌀을 30석 실을 수 있는 배이고,<20석선>이란 쌀을 20석 실을 수 있는 배를 말한다.

이러한 곡식 운반선 외에 세토내해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이 후시미항으로 들어왔고, 1611년 이후에는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주인선(무역선)들이 이 항구를 통해 출항했다.

주인선은 일본의 은과 비단 등을 싣고 오키나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심지어는 버마와 태국에까지 가서 팔았고, 동남아로부터는 물소뿔,상아,향료.토산품을 수입했다. 그것들이 입하되던 항구가 후시미였다.

후시미는 막부시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에 모든 물산을 입하하는 창구였던 것이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후시미는 일본의 대표적인 상인도시가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후시미 상인의 솜씨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 중의 일부를 오사카로 이주시켰는데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 오늘날 오사카의 중심인 중앙구 본정통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주로 비단이나 면과 같은 섬유제품을 취급했다.

그들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교토의 언어를 고집했다. 교토 말은 모가 나지 않은 부드러운 말이다.부드러운 말씨야말로 손님에 대한 대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후시미 상인들은 천년전부터 이미 상도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장사를 하는 것이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인가를 오랜 경험과 지혜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 4회 일본의 개성상인,오미(近江)상인
오미 상인은 예부터 일본의 상인 중의 상인이었다.

오미상인은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코(琵琶湖)와 이웃하고 있는 하치반(八幡),히노(日野),고카이죠(五箇壯)등 세 지역 출신을 말한다.이 세지역 상인은 서로 약간씩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그들을 일컬어 오미상인이라 한다.오미상인의 상징은 천칭봉(天枰棒)이다.어깨에 나무봉 하나 올려매고 양쪽에 물건을 매달고 가는 것이다.

그들은 포목이나 베,옷감 등을 지고 다니며 팔았다.그들의 말에 <천량천칭>(千兩天枰)이라는 것이 있다.나무 막대기인 천칭봉 하나만 있으면 천량의 돈을 벌 수있다는 말이다.그들의 불타는 상혼을 읽을 수 있는 말이다.
그들은 혁신적인 상법과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손님을 대할 때는 늘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그들의 상혼은 무서웠다.

일본 전국의 나루나 포구에 오미 행상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에도 오로지 걸어서 북으로는 천Km밖의 북해도부터 남으로도 천 Km밖의 큐슈까지 행상을 다녔다. 북해도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이 1890년대의 일인데 그들은 아이누족이 수렵으로 살아가던 1500년대중반부터 북해도에 이미 장사를 다니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의 상혼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해외까지도 개척에 나섰다.베트남과 태국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1600년대에 그들은 이미 동남아를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오미상인의 상술은 박리다매였다.

이익은 조금 남기는 대신 물자공급능력을 무한대로 갖추고 있었다.개당 이익은 작지만 판매량이 큰 상법을 썼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행상을 다니고 있었으므로 지역별로 물건가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이용해서 그들은 한푼이라도 물건을 더 싸게 팔았다.

<한푼을 위해 천리를 간다>
오미 상인의 상술이었다.
또 하나 오미상인이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직접 물건을 제조하고 직접 판매를 했기 때문이다.
오미 지방에서 나는 공산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일본의 여러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사들여 그걸로 물건을 만든 후 다시 내다팔았다.

예를 들면 일본 동북 지방에 오미의 특산품인 마포(麻布)를 내다팔고 대금 대신 저마(苧麻)를 가져다가 가공해서 제품을 만들어 파는 방식이었다.

자본과 기술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술과 기름의 경우도 아예 제조권을 취득해서 기술자를 고용하고 재료를 사들여 완제품을 만든 후 그걸 오미 상인들이 내다 팔았다.

당연히 여타 지방의 것보다 가격 경쟁력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신분조차 극복한 상술
오미상인은 처음에는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도 하의 최하위로서 그들의 표현대로 ‘벌레와 같은’신분이었지만 그들은 겐로쿠 시대에 출발한 화폐경제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천평봉을 어깨에 매고 옷감행상으로 시작한 그들은 차츰 상품을 늘려나갔다.
모기장, 다다미, 등, 부채, 칠기, 환약, 담뱃대, 차(茶), 삿갓 등이었다.

막강한 상술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한 그들은 드디어 일본의 상권을 쥐기 시작한다.
시골의 촌마을 출신인 오미행상들은 1615년 일본의 수도였던 에도(江戶)의 한복판인 니혼바시(日本橋)에 첫 지점을 낸 이래 오사카의 번화가인 본정통(本町通)과 교토의 중심인 무로마치(室町) 등 일본의 3대 도시에 모두 진출, 지점을 낼 정도였다.

거기서 그들은 금융업, 양조업, 유업(油業), 주물업, 전당포 등으로 진출했다.
마침내 천하의 상권을 쥐자 다이묘(大名.번주)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천하의 제후들들도 그들의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형제집안인 어삼가(御三家)도 그들의 돈을 빌렸고,큰절의 주지도 그들의 고객이었다.
또 시골마을의 영주들도 그들의 돈을 빌려썼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가 벌벌 떤다>는 말은 바로 그들로부터 유래한다.
사치를 하느라고 만년 적자에 시달리던 지방의 제후들은 그들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으면 번의 유지가 안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렇게 금융업을 비롯한 제조, 유통분야에서 일찍이 상재를 발휘했다.

금융업에서는 메이지 유신(1868년)이후 은행을 앞다투어 설립했고, 유통의 경우는 일본의 최대,최고의 백화점이 그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또한 일찍이 1600년대에 베트남, 태국 등과 해외 무역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유수의 종합상사가 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오늘날 일본 굴지의 백화점 세이부그룹,다이마루 백화점,다카지마야 백화점, 종합상사 이토츄(伊藤忠), 마루베니(丸紅),도멘과 일본생명주식회사, 여성내의 회사로 유명한 와코루 등이 바로 오미 출신 상인들이 일으킨 대기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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