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17-2
보스톤코리아  2012-06-11, 12:32:24 
암살단은 경복궁에 이르러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수비대장 홍계훈을 사살하고 근정전으로 달려들었다. 악당 낭인배들은 시퍼런 일본도를 휘두르며 황후의 처소를 찾아 국왕을 위협하는 난동을 벌였다. 미명에 왕국에 살극이 벌어 진 것이다. 건청전의 내시 이학균(李學均)을 잡아 황후의 침전을 알아낸 다음 곧장 곤령각(坤寧閣)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막고 서 있는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참살하고, 궁녀들을 끌어내어 무참히 일본도로 살해했다. 궁녀 3인중의 한분이 명성황후였다. 그들은 황후의 시신을 확인한 후 경회루 옆의 옥호루 앞 풀밭에 끌어다가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시체에 석유를 끼었고 불태워 버렸다. 일본의 야구자 낭인배들은 명성황후의 시해를 흔적 없이 하여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만행이다.

식인종 야만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겠는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왜 일본 공사와 대원군의 공모로 일본인 낭인배의 칼에 맞아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은 조선의 내정개혁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원군과의 정권다툼에서 희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지, 혹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침략을 사전 방지하려고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 들이려는 것을 막고자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제 명성황후시해에 따른 미우라 일본공사와 대원군의 변명을 들어보자. 일본공사 미우라 중장은 명성황후 시행에 앞서 호언하기를 " 20여 년간 조선을 혼란케 한 악폐를 근절하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대원군은 명성황후시해에 대한 포고문에서 “ 유신지대업 장중도이폐 오백년지종사 일일이위 여생우종친지가 부인좌시..." (維新之大業 將中道而廢 五百年之宗社 一日而危 予生于宗親之家 不忍坐視..)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유신의 대업이 도중에 실패하여 오백년 사직이 날로 위태롭다. 나는 종친의 가문에 태어나 결코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포고문에서는 "나는 국왕을 보좌하기 위하여 비열한 무리를 제거하고 선정을 이루어 나라를 구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왕궁에 들어왔다"라고 선언하였다. 한때 대원군이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하야한 기간 동안에 명성황후가 모든 실권을 행사하며 정치에 관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황제의 치하를 여인천하((女人天下)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 이전에는 명성황후께서 실권을 행사하였기에 정부요직에는 황후의 세력을 빙자하는 외척 민씨 일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반대 측에서는 후빈용권 (后嬪用權) 과 처족난정( 妻族難政) 이라고 밀어 부쳤다. 명성황후를 비하하는 말도 많이 돌았다. 사람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서경에 있는 고어인 “빈계사신은 유가지삭 (牝鷄司晨 惟家之索) 즉 집안의 대가 끊긴다를 인용하며 명성황후의 정치주관을 비꼬았다. 그러나 역사에서 증명했듯이 명성황후는 희대의 여걸이었다.

나는 명성황후의 총명과 그 정치능력을 높이 평가하거나 또는 두둔하려고 이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국왕과 왕비의 일생은 그 나라의 역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황실에 대한 사건은 역사와 같이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근세사를 보면 일본학자들의 서술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 한 예가 명성황후에 대한 서술이라고 하겠다. 갑오개혁을 전후로 한 조선의 정치현황에서 보자. 명성황후는 개혁을 밀어붙이려는 일본세력에 대항하여 왕권을 수호하고 왕실의 안정을 위해 예민한 통찰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에 슬기롭게 대항하는 한편 정적인 대원군을 주축으로 하는 반대세력과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개화파를 상대로 끊임없이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국왕 고종께서는 본래 성품이 착하시며 매사에 있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국왕이 우유부단하여 국사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도 많았다. 사실 국가의 중대사에 있어서 국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여 판단이 모호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황후께서는 비서처럼 항상 옆에 계시다가 국왕께서 말이 막히거나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는 황후께서 대신 결정을 내셨다. 영국의 여류작가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경복궁을 찾아 고종과 명성황후를 배알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국왕전하께서 말씀이 막히시거나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왕비께서 친절하게 자세히 말씀하며 조언했다."라고 당시의 소감을 전해 주고 있다. (조선기행)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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