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2-11, 12:51:08 
200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TV 방송에서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함대가 와서 강화도를 공격하고 탈취해 갔던 강화외규장각의 도서 279책이 반환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같은 무렵에 TV 방송에서 일본이 한일합방 (1910년) 후 약탈해 갔던 평창의 오대산 사고 장서였던 <이조실록> 과 <명성황후 국장도감의 궤> 등 여러책이 반환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제야 국가와 민족의 수치를 설욕한 것 같다.

이씨조선후기는 기독교사상의 전래와 개항문제로 외세의 침략이 자주 있었다. 신미양요 (1871년) 병인양요 (1866), 덕산의 남현군묘의 도굴사건이 그것이다. 1866년 9월 천주교 박해를 이유로 프랑스 함대가 2차례 걸쳐 강화도를 공격하고 강화읍내에 있는 외규장각도서를 탈취해갔던 것이다. 이를 병인양요라고 한다.
프랑스 군대는 당초 강화도의 정족산 성내에 있는 강화사고의 이조실록을 탈취할 목적으로 정족산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봉장 양현수의 반격으로 크게 패하고 내려와 그대신 강좌도 읍내에 있는 외규장 각도서를 탈취해 갔던 것이다.

프랑스군이나 일본이 왜 이조실록을 탈취하려고 했는가이다. <이조실록>은 이씨왕조 25왕의 실적을 수록한 것으로서 그것은 왕정의 정통을 천명한 국가의 기록이다. 그래서 국가는 그것을 신주와 같이 사고에 봉한하여 왔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조실록의 탈취에 실패하자 그 2년 후인 1868년 4월 옵펠트라는 자가 군함을 끌고와 아산만에 상륙,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발굴하여 그 유골을 탈취해 가려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역사 이래로 국가는 산대찰의 경내에 사고를 짓고 각 왕의 실록을 신위와같이 모셔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상실은 그 옛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필리스타인 (Philistines)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신주로 모시던 10계명의 법궤를 적에게 빼았긴 것이나 같은 불행한 일이었던 것이다.

적군은 언제나 상대방의 왕을 포로로 하거나 아니면 그 나라의 왕권을 상징하는 옥쇄나 <왕조 실록>을 탈취해 가려고 하였다.

사실 프랑스 함대가 와서 강화도를 공격하고 거기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몽땅 가져간 것이나 일본이 오대산사고의 <이조실록>을 약탈해 간 것은 당시에 한국을 멸시하고 그 역사정통을 끊으려고 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 도서가 다 반환되었다고 하니 실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조실록은 신주와도 같이 모셔온 국보일 뿐 아니라 그것은 한국역사와 동양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문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조실록> 은 정식서명이 아니다. 각 왕의 실록은 왕의 시호 하에 서명이 주어져 있다. <이조실록>은 일본의 사학자가 조선조각왕의 실록을 총합하여 편의상 주어진 명칭이다. 이 일본인이 준 명칭이라고 해서 <조선왕족실록> 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본사람이 붙인 용어가 어디 <이조실록> 하나뿐이겠는가. 국어 대사전에 보면 일본말 번역어가 널려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강화외규장각 도서의 내용과 그 수량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한일합방후 일본이 탈취해간 평창의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과 여타도서의 내용과 수량에 대해서도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나는 1961년 규장각 장서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서 정족산성 내 전등사의 경내에 있었던 강화사고와 강화행궁 뒷편에 있던 강화외각의 유적을 세번이나 답사했다.

강화외각은 전란을 피하여 귀중도서를 보관하려고 건립한 규장학의 본관이다. 그 규모는 그리 크지가 않았던것 같다.

정조대왕 8년 검사관 이덕우가 내려가 조사보고한 형지안 (形止案)에 의하면 강화외각의 총 장서수는 1255건 4790 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가 반환한 책은 297 책이라고 한다. 그것은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읍을 공격하고 거기에 있는 규장각의 본관인 강화외각의 장서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니 덮어놓고 크고 그림이 있는 책 만을 골라낸 다음 넘어지는 강화행궁과 함께 불질러 버려서 행궁의 보물집기와 함께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규장각은 아시다시피 이조 제 22대 정조대왕이 설립한 왕립 도서관으로 그것은 한때 홍문관이나 예문관에 으뜸하여 문화를 부흥시킨 중요기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규장각의 설립과 그 기능에 대한 논문이나 소개의 글이 많이 발표되어 있다. 그러나 규장각 도서의 수집과 정과 보존, 그리고 6.25 한국전쟁 때 피난 소개하였던 사정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것 같다.

나는 6.25 전란시에 용케 살아남아 9.28 수복후 도서관의 빈 사무실을 지키다가 1.4 후퇴 한달 전인 12월 4일 정부의 명령을 받고 규장각 도서중 국보적인 이조실록 원본과 승정원 일기, 비변사 등록 일성록등 귀중도서 7천 여책을 싣고 부산에 피난하여 197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루어져 9월에 환도하기까지 3년간 지켰다.

환도 후에는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도서를 모아 정리하는 한편 규장각도서 16만권을 분류하여 그 저자와 서명명록을 작성해 놓았다. 그래서 규장장서의 내용을 어느정도 알고있다.

규장각도서에 대한 글을 쓰라는 권고도 여러분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글이 혹 내 자랑이거나 자서전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아 글 쓰기를 주저해 왔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 방면의 연구를 위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것 같다. 우선 6.25 전쟁시의 사정을 살피고 1.4 후퇴시 이조실록 등 규장각 도서 중 귀중본을 부산에 피난소개한 사실과 환도 후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도서를 거두어 정리하고 규장각도서 16만 여권을 분류하여 목록을 작성한 일들을 말하기로 한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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