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6-17, 14:07:14 
차순영과 나는 갈 데도 마땅치 않았고, 또 부산에 가져온 규장각도서를 지켜야 할 책임도 있어, 규장각도서가 보관된 대한부인회 부산지부에서 기거하기로 하였다. 부인회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절이었거나 아니면 무도장이었던 같았다.  

큰 홀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부인회는 처음에는 우리를 귀중한 이조실록을 가지고 온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해 주었다.  부인들이 치마를 이어서 커튼을 만들어 칸막이로 하고 우리를 그 뒤에서 자라고 했다. 그러다 얼마 후 서울로 올라갔던 동료가  1.4 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 친구들도 갈 데가 없어서 우리와  함께  부인회에 기거하였다. 이들 외에도   1.4 후퇴로 인한 난민들이 부인회에 수용하게 되면서 부인회는 난민수용소로 변했다.  원래 부인회는 10세 이상의 남자는 안되는 여자만을 수용하는 남녀 7세 부동석인 금남의 집이었다.  

그런데 낯선 장정 다섯 사람이 있으니 그대로 놔 둘리가 만무했다. 어느 날 밤이다. 부산지구 위수사령부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일개 중대의 병력이 들이닥쳐, 우리를 거제도로 보내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부인회가 알지 못할 남자들이 들어와 있으니 쫓아내 달라고 부산 위수사령부에 고발한 것 같다. 나는 “전시요원증”을 내보이고, 창고 문을 열고 쌓아 논 이조실록을 보여주었다.  

이 도서는 국보도서와 같아서 나는 그 어디로든지 따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대위인 인솔장교가 창고에 쌓인 이조실록을 들춰 보고는 이조실록이 귀중한 역사서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는지, 음성을 낮추고는 “미안하지만, 상부의 명령이니 딴 데로 옮겨 주셔야 하겠다”라고 사정하였다.  결국, 그날 밤으로 우리 다섯 사람은 기거하던 부인회의 취사장에서 쫓겨났다. 취사장은 별로 자주 사용치 않았으나, 협소하여 다섯 사람이 기거하기에는 편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며칠 후인 1951년 1월 23일에 대한부인회  부산지부로부터 이조실록이 보관된 창고의 명도와 함께 수행원 전원에 대한 퇴거령이 전달되었다.

이병도 중앙도서관장이 경상남도 도청에 교섭하여 경상남도 내무과의 무기고를 빌리기로 하고 부인회 창고에 보관된 이조실록을 모두 무기고로 옮겨 보관했다. 부인회에 있을 때이다. 경무대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규장각도서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공문이  하달되었다. 대학 본부  총무과장이 목록 작성에 필요한 예산을 가지고 와서 차순영 주임에게 주면서, 1주일 내로 목록을 작성해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그 지시가 참말로 경무대의 명령인지 아니면 문교부의 요구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경무대에서 보고하라고 했다고 들었다. 당시 경무대는 하와이교포인 양유찬 경상남도 도지사의 공관을 사용했던 것으로 안다. 어쨌든 목록을 작성해야 할 담당자는 나였다. 차순영 서무주임이 인부를 사서 목록을 작성해야 할 것이라며, 내게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 그것이 얼마이었는지는 지금 기억되지 않으나 꽤 많은 금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의 과다가  아니었다. 부산에 갖고 내려온 규장각도서가 도대체 무슨 책인지를 알아야 목록을 작성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알 수 있는 것은 서울에서 김두헌 총장서리가  준 쪽지에 적힌 서명뿐이다. 책의 내용은 고사하고 한 제목의 책이 몇 권 몇 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온 규장각도서 일부는 광복동의 관재청 창고에 보관되어 있고, 이조실록은 대교동의 대한부인회 부산지부 창고에 있다. 

더구나 7천여 책이나 되는 것을 어디다 펴 놓고 조사한다는 말인가. 인부를 구한다 하더라도 당장 작업을 시작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목록을 작성해야 할 사람은 사서 나 한 사람뿐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사서관도  아닌 내가 규장각의 중요한 도서를 가지고 부산에 내려와 그것을 지키고 있게 된 사정은  규장각의 내용을 잘 알아서도 아니다. 

어쩌다가  9.28 수복 후에 사서라고는 단 나 하나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서라고 하지만 무식이 풍부해서 그 책들이 무슨 책인지 알아야 목록을 작성할 것이 아닌가. 승정원일기와 이조실록은 모두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 있고, 또 언제 어디서 누가 편찬하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참으로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일찍이 조선역사를 배우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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