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7-22, 13:59:08 
나는 크게 걱정이 되어 머리도 식힐 겸 남포동 거리로 나갔다. 남포동 극장 옆 골목에 다방이 하나 보였다. 차나 한잔 마시면서 쉬었다  가려고 들렀다. 그런데 어찌나 손님이 많은지 빈자리가 없다. 다방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하고 좀처럼 빈자리가 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도로 나와 돌아보니 바로 다방 옆에 고서 책방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구경이나 할까 하고 들어가 보았다. 서점은 그리 크지 않은데 서울에서 내려온 책들로 가득 차있다. 

나는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른 것이 아니다. 그저 구경삼아 들러 본 것이다. 무심히 서가에 꽂힌 책들을 둘러  보던 중 한 서가 구석에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무슨 책인가 하고 꺼내어 펴 보니 우리가 서울에서 갖고 내려온 규장각도서에 대하여 일본어로 잘 설명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이게 웬일인가?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하는가.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 보다. 서점주인이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주고 샀다. 숙소로 돌아와서 이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가 부산에 갖고 내려온 규장각도서 귀중본의 사진판과 함께 해제가 일본어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문방구로 달려가 미농지와 먹지 그리고 골필을 사 가지고 와서 일본어로 쓰인 해제를 번역, 정서하여 목록을 작성하였다. 차순영 서무주임과 함께 부산시립도서관 내에 있었던 전사편찬위원회의  이병도 도서관장의 결재를 받으러 갔다. 이병도 관장이 규장각도서 목록을 보시고 “이거 누가 작성했는가?” 하고 물으시기에 “제가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백군이 어떻게 알고 이 목록을 작성했느냐”고 하시기에 고서점에서 <조선도서해제>를 사서 그것을 보고 작성했다고 대답했다. “그렇겠지” 하시면서 날씨가 차니 국제시장에 가서 필드 재킷을 사 입으라고 하시면서 돈을 주셨다. 내가 목록 작성 시 인용한 <조선도서해제>는 조선 총독부 참사관 실에서 편찬하여 1919년에 간행한 초판의 1932년도 증보판이었다. 이 도서해제는 일본의 조선 침략사와 깊은 관계를 맺는 책이다. 일본제국은 1910년 조선을 합방한 후 식민지 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조선왕조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조사 연구케 하였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고 식민지 통치도 그 지방의 사정을 모르고서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는 정무총감 직속 하에 참사관 실을 두고 규장각도서를 착취하여 조사케 하였던 것이다. 총독부는 이 사업을 위하여 이마니시(今西龍), 오다(小田省吾), 스에마쓰(末松保和), 마예마(前間恭作) 등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조선 시대의 전적과 역사를 연구케 하였다. 그 결과로 편찬 간행된 것이 바로 이 <조선도서해제>이다. 이때 규장각도서로 조선사 연구에 참여했던 일본인 학자들이 1925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대거 교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선도서해제>는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 조사하여 작성된 책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한국의 고서인 규장각도서에 대한 목록이나 도서해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 후로 이 도서해제를 탐독하여 규장각 장서의 구성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규장각 장서에 대한 연구>는 내 대학원 석사논문이다.

우리가 부인회 부산지부에 거주한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일이 지금도 인상에 남는다.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은 서울에서 피난 내려와 부인회에 같이 기거하던 여학생들과의 일화다. 이들은 여학교 가사시간에 배운 요리법 과시 겸하여 마당에 숯불 화로를 피워 놓고 도넛을 튀겨 팔곤 했다. 우리는 좋다고 하며 튀겨 내기가 급하게 사 먹어 주었다. 사실은 도넛이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처녀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다. 지금 같으면 참으로 흉측하고 한심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연만한 총각들이다. 우리 중에 가장 핸섬했던 차순 영은 이들 중 기어이 한 숙녀를 찾아 그해 여름 부산국제시장 근처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들러리가 있어야지. 내가 들러리 겸 축사를 써 가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1951년 1월 4일 정부가 서울에서 철수하여 부산으로 내려온 사태가 바로 1.4 후퇴이다. 온 누리가 얼어붙은 엄동설한에 겪은 후퇴는 피눈물 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9.28 서울 수복 후 승승장구로 북한의 공산군을 무찔러 마의 38선을 돌파하고 10월 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다.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 강변 도시 혜산진까지 도달했다. 1950년 10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이 함흥극장에서 환영 연설을 했다. 그리고 10월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하여 환영의 연설을 했다. 

이제 숙원인 남북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중공군의 내습이 시작되었다. 중공의 팽덕회 장군이 이끄는 중공 인민의용군 60만 병력이 1950년 10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진격해 왔다. 소련제 장비로 중무장한 중공군은 인간총탄이라는 인해전술로 땅벌같이 덤벼들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국경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1월 25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을 포기했고, 9일부터는 원산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감행되었던 흥남철수작전은 실전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공포와 절규가 뒤섞인 철수였다. 

나는 현봉학 박사의 " 현봉학과 흥남 대 탈출" 이라는 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의사인 현봉학 박사는 당시 미군 해병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민사부 고문으로 알몬드 소장을 설득하여 부두에 운집한 피난민을 함정에 태워 거제도로 후송하기로 결정토록 한 영웅적 역할을 하여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리운다. (전쟁 후 현 박사는 서재필 박사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흥남에서 철수하던 마지막 날 12월 24일은 불을 뿜는 전쟁이었다고 한다.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이 피난민 철수를 저지하려고 공격해 온 것을 유엔군은 공습과 폭격으로 분쇄하면서 9만 1천 명의 북한 피난민을 흥남부두에 모아 군함으로 후송한 철수 작전은 전투를 방불 하는 사생의 찰나였다고 한다. 6.25를 겪은 사람은<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제목의 <현인> 씨의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한미노인회의 <배흥선> 이사에게 부탁하여 가사 전문을 구했다. 여기 제1장과 3장만 소개한다.

1장)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1장)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이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춰보자
작사: 강사랑,  작곡: 박시춘, 노래: 현인

이북5도민, 이산가족, 그리고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 난민이 처절하였던 전쟁을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지 꿈만 같을 것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눈이 퍽퍽 내리는 엄동설한에 보따리를 지고 안고 정처 없는 피난길을 울며 넘던 고난의 1.4 후퇴 말이다. 그런데 1949년에 건국하여 1년여 밖에 안 되는 중화민국공화국이 국내사정도 안전치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과 16개국의 유엔군을 상대로 군사를 일으키는 위험을 감행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북한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그를 구하기 위해서 출병한 것인지, 아니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권고를 거절하기 어려워서 참전한 것인지 여러 의문이 따른다. 그런데 중공은 출전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미국은 북한뿐 만 아니라 중국의 본토까지 점령하려고 하기 때문에 국토를 사수하기 위해서 출전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을 위한 변명이고, 그보다도 출전의 진실 된 이유는 오히려 중. 조관계의 역사적 사실 즉 혈맹이라는 것이 그 동기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어쨌든 유엔군은 곧 전세를 만회하여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북진하여 중공군을 38선 저 밖으로 내 몰았다. 이때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만주 폭격을 제의했다. 그런데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반대와 제3차 대전을 우려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1951년 4월에 해임했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영웅인 맥아더 원수는 귀국한 후 미국의 국회에서 행한 퇴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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