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4
보스톤코리아  2013-12-02, 11:22:01 
무과武科와 무예의 퇴보 - 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무예가 줄어든 원인의 대표적인 역사의 변화는 첫째로 태종때의 사병혁파私兵革罷이다. 사병私兵의 힘으로 두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사병의 힘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왕좌에 오른 뒤에는 아무도 사병을 소유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자연히 왕족이나 고위사대부들이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던 사병들이 없어짐에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둘째는 무과武科의 도입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시험에 무과를 도입함으로서 과거에 필요한 재능만 수련하게 되어 무술의 발전에 커다란 저해를 가져왔다. 세째로 화포의 보급이다. 고려말엽에 도입된 화약으로 인하여 총포를 비롯한 무기武器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총포는 며칠만 잘 배우면 사용이 가능하고 그 위력도 대단하였다. 하지만 무술은 맨손이나 궁술, 검술, 창술에 관계없이 고수가 되려면 몇년에서 심지어 몇십년을 연마 해야만 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일반 병사들에게는 무술 수련의 비중이 적어지고 총포의 훈련이 증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극기를 통하여 수련해야 하는 참 무술은 그 수련 인구가 감소되고 점차 은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총포의 사용증가로 무예의 역할이 병술로서의 가치는 양적으로 감소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무술의 질적 가치는 여전하였다. 왕들이 특별한 날에 모든 왕족과 대소신료들을 입직케 하여 관람하였고, 특출한 무인에게는 푸짐한 상과 함께 품계를 올려주었으며 면천도 시켜주었다. 태종실록(32권, 1416년7월1일) 에 보면 “상왕의 탄신에 경회루에서 헌수하고 각투와 수박희를 구경하다.” 라고 실려 있으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임금이 상왕上王을 경회루에서 받들어 맞이하여 헌수獻壽하고 노래부르고 화답하여 지극히 즐기었으니, 상왕의 탄신誕辰인 때문이었다. 세자와 여러 종친이 모두 시연侍宴하였다. 

이어서 입직한 대소신료大小臣僚에게 술을 주고 갑사甲士와 방패군으로 하여금 막대로 각투角鬪하게 하고 또 수박희手搏戱를 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 라고 적혀 있으며, 한 달이 조금지난 8월에도 같은 장소에서 연회를 하면서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상왕을 모시고 경회루에 술자리를 베풀고, 수박희를 잘한 윤인부에게 곡식을 내리다. – 경복궁에 거둥하여 상왕을 봉영奉迎하여 경회루에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세자와 종친이 시연하였다. 갑사와 방패군 중에 힘이 있는 자를 모집하여 수박희를 하게 하여 사직司直 윤인부尹仁富에게 쌀과 콩 각각 5석을 주었으니, 수박을 잘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는 국교가 불교였던 관계로 일부 승려는 국사나 왕사 등 최고의 정치적 위상을 가졌으며 일반 승려들도 높은 사회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많은 귀족이나 왕족들도 승려가 되었다. 일례로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왕후王煦는 어린나이에 승려가 되었으며 해동 천태종을 세운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흥시조이다. 그가 바로 의천義天이며, 그의 시호는 대각국사이다. 또 신돈과 같은 승려는 권력의 최고의 정점에서 원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려는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강한 반원정책과 함께 백성을 위한 개혁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말로는 수구세력들에게 밀려 귀양을 가서 죽임을 당했지만..., 그리고 공민왕의 후비 혜비惠妃 이씨李氏 처럼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가 출산을 하다가 죽은 후 만사에 의욕을 잃고 죽은 왕비의 초상화 앞에서만 허탈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신돈이 상납한 반야는 왕자를 출산하였다. 그러자 신돈의 세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었다. 권력의 추가 신돈측으로 지나치게 움직여 자신들의 목을 조여옴을 느끼던 최만생일파는 반야를 매수하여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략을 꾸미게 된다. 왕자를 생산한 반야는 수구세력의 꿰임에 넘어가 신돈을 죽이는데 일조하였다. 공민왕의 혼미한 국정은 계속되었고 동시에 공민왕을 타락시켜 폐위하려는 최만생일파는 장안의 미소년들을 모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였다. 형식상으로 왕을 가까이서 호위하는 젊은이들이었지만 결국 공민왕은 그들과 밤낮으로 동성애에 빠져서 허우적 거렸고, 그것도 모자라 홍륜洪倫과 한안韓安으로 하여금 비빈들 까지도 범하게하는 삼강오륜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태까지 가게 된다. 이 해괴망측한 황음은 왕비인 익비益妃가 임신을 하게 까지 하였다. 이렇게 동성간의 성행위와 무분별한 이성간의 정사가 궁궐을 넘치고 있었지만 혜비는 끝까지 거절하였고, 공민왕이 최만생 등에게 시해弑害당한 뒤에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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