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1
보스톤코리아  2014-02-10, 11:47:41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집안이 가난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였지만 학문을 열심히 하여 1567년(23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어릴때 부터 총명하였고 유순하고 효성이 깊었다. 조헌은 외유내강과 곧고 바른 관리의 표상이었다. 그는 하급관리 때에 임금 선조가 불공을 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으며, 명나라를 다녀온 후엔 그곳의 문물과 제도중에 받아드려서 개선하면 도움이 되는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582년에는 노산군(단종)의 후사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상소했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난지130여년이 지났지만 사육신은 그때 까지도 역적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앞을 내다 보는 혜안 또한 밝아 정여립의 동태를 보고 모반의 낌새를 차렸고, 정여립의 의중을 지역 관찰사에게 보고했지만 관찰사는 화를 두려워 우물쭈물하며 비겁함을 보였을 때, 그는 의기있게 관복을 벗어 던지고 옥천으로 은둔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으며 가산사에서 수행하던 영규대사와도 교류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상소를 하였지만 ‘광론’이라는 배척을 받고 길주로 귀양을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있었기에 그의 앞을 보는 지혜를 인정받아 귀양에서 풀려났다.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개혁안을 많이 상소하였고 정론주의자였다. 

1591년 3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길을 내어 달라고 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도끼를 들고 한양으로 가서 사신들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였다. 이렇듯 그는 당대에는 용맹스럽고 완고한 인물로 평가 받았지만 강인하고 올곧은 성품의 선비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불운하게도 파직과 유배를 반복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군율확립, 훈련강화, 군정확보, 군비확충 등 전반적인 국방강화를 할 것을 여러차례 상소하였지만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조헌의 모든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으며 조선의 관군은 왜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였으며 백성들이 유린당하였다. 그는 결국 남의 나라를 침탈하는 도적같은 왜적을 몰아내기 위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며 백성들을 살리는 방도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1,600여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 탈환을 계획하였다. 8월1일 조헌은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하지만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들이 강제해산 당하고 700여명의 의병만 남게되었다. 이후 그는 영규와 함께 금산 공격을 위해 권률과 연합작전을 계획하고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금산의 일본군은 모두 정규군이고 그 수효도 수 만명에 이르니 섣불리 대적할 수 없다고 봤으나 그는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 계시는데 이둔利鈍을 논하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되니 나는 한번 죽는 것만 알 뿐이다.” 라며 영규와 함께 진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권율부대는 사정상 연합작전을 미뤄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금산성까지 진격한 뒤였다. 그리하여 조헌은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일본군과 금산성 밖에서 일전을 하였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독려하며 혈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진 뒤에도 한 명도 도망가는 의병이 없이 육박전으로, 즉 그들이 가산사에서 수련한 무예와 무도 정신의 기량을 최후까지 발휘하면서 싸우다 모두 순절했다. 조헌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영규의 승병들도 거의 순절하였으며 영규는 중상을 입고 며칠뒤 사망하였다. 물론 일본군도 사망자가 많아서 3일간 시체를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부대와 함께 퇴각함으로서 호서와 호남지방은 안전하게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왜군들이 물러간 뒤 박정량朴廷亮 등이 순절한 의사 700여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으로 합장을 했는데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부른다.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으며 사적 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간악한 일본은 역사적인 사실을 은폐하려고 일제 말기에 칠백의총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칠백의총은 1963년에 정화작업을 하였고, 1968년 및 1976년에 건립하였다. “조헌은 평범한 관료라기보다 강직한 선비 같은 인물이었다. 

율곡의 사상을 이어받은 개혁사상가로서 평소에 군비 강화를 주장했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전쟁을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직접 최일선에서 의병으로 종군함으로써 지행합일을 몸소 보여준 실천가였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인 인도와 정의를 추구했고, 무엇보다 민생안정의 바탕 위에 인간다운 삶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역사적 지성이었다. 의리정신을 계승해 위민, 애민으로 그의 삶을 일관했던 참다운 선비였으니 그의 정신은 영원히 귀감이 될 것이다.”(국방일보)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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