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3
보스톤코리아  2014-02-24, 11:52:02 
그의 졸기에는 전란을 듣고 미쳐서 사재로 악소배를 모집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피신해버린 고을 수령들의 못난 행동에 분개하여 의분을 참지 못하였으며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충의단심忠義丹心의 발로와 스스로 향리를 보전해 백성들을 왜군의 살육으로 부터 구해야 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휘하의 장졸들은 악소배가 아니라 그와 같이 의분을 참지 못했던 의사들이었고 무술에도 뛰어난 용감한 백성들이었다.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관리의 후손으로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볼 수만 없었기에 분연히 일어난 ‘지식인의 양심’이었으며 ‘무武와 병兵이 진도眞道’로 향하는 것을 실천하였다. 

그는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해입고 백마를 타고 신출귀몰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천강홍의장군’이라 불렀다. 위계에 의한 기습공격과 유격전은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때로는 적진에 단기필마로 종횡무진하면서 보인 그의 병술과 무술은 가히 말 그대로 하늘에서 온 신기로만 보였다고 한다. 

고향 경남 의령을 중심으로 기강진,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진주까지 출전하여 연전 연승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그의 ‘정암진전투’의 업적은 의병이 왜적과 싸워 처음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격하려던 왜적의 진로를 막을 수 있었다. 그 후 전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은 결렬되었고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경상좌도방어사로 출전하였다. 전란이 종결된 후 많은 직책에 제수되었으나 여러 이유를 들어 벼슬에 나가지 않고 낙향하였다. 보호를 받아야 할 백성들이 오히려 의병으로 출전하여 왕과 나라를 지켰지만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공적은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차지하고 의병들 특히 의병장들을 포함한 많은 무관들은 모함과 시기로 관직을 떠나거나 심지어 유배생활도 하였다. 곽재우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스스로 낙향하였다. 

그는 활달한 필체에다 시문에 도 능숙하여 자신의 호를 딴 문집인 ‘망우집忘憂集’을 남겨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큰 칼 등 유물은 보물(671호)로 지정되어 그의 체취를 풍기며 충익사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충익忠翼은 왕이 내린 그의 시호이다. 충익사33)는 곽재우와 휘하의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616년 그가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의 마지막 광경이 졸기이 이렇게 적혀있다. 

“어느날 홀연히 바람과 우레가 그의 방을 감싸더니 곽재우가 그 방안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에 사람들이 정렬精烈에 감응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술뿐만 아니라 도술도 부렸다고 전하며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農經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으며 도가의 달인처럼 생의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혹평을 한 그의 졸기와는 달리 그의 사후 사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심없이 충의단심으로 대장부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 광해군9년, 1617년)에 보면 “사신史臣은 논한다. 곽재우는 참으로 이른바 부귀富貴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할 장부이다. 임진왜란 초에 포의布衣로서 향병鄕兵을 끌어모아 왜적을 섬멸해 공을 많이 세워 찰리사察理使의 직임에 제수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에 여러 차례 방백과 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뜬구름과 같이 보아 표연히 시골로 내려 갔으며, 필마에 종 하나 거느리고 가야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돌아와서는 초가집 몇 칸을 낙동강 하류에다 얽어놓은 다음 그 집의 이름을 ‘창랑滄浪’이라고 하고, 스스로 호를 ‘망우忘憂’라고 하였다. 삿갓과 도롱이를 입고 지내면서도 즐거워하면서 세상을 잊었으나, 말이 국사에 미치면 항상 마음을 쓰며 잊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혹 그가 소나무 잎을 먹는 것을 가지고 하찮게 여겼으나, 이끗을 다투느라 칼날을 쓰다듬고 하찮은 일에 골몰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어찌 크게 다르지 않겠는가.” 이 얼마나 멋있게 살았는가! 그는 65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으며 그의 죽음을 슬퍼한 광해군이 직접 하명하여 모든 장례 물품을 지원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곽재우의 생가34)는 복원되어 현존한다. 생가 앞에는 수령 오백년이 넘는 은행나무35)가 있으며 그가 무술과 검술을 수련했던 생가 뒷동산은 잘 정비되어 있다. 
 
33)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소재, 곽재우와 휘하의 의병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내의 우뚝 솟은 의병탑은 곽재우와 휘하 17장령들의 위훈을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높이는 27m이고 가운데 18개의 백색환은 곽재우와 17장령을 뜻하고 양 기둥의 팔자형은 횃불을 상징한다.

34)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소재
35) 천연기념물 302호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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