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5
보스톤코리아  2014-03-10, 12:01:51 
임진년에 이르러 왜적이 쳐들어 오자 부인은 김천일에게 말하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영웅들과 교제하게 함은 이 같은 때를 당해 힘을 얻기 위함이니 의병을 창기倡起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시부모님들이 피신할 장소는 이미 마련해 두었으니 조금도 염려마시고, 군량미도 갖추어져 있으니 의병을 모집하라고 권했다. 

김천일이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니 원근에서 그간 은혜를 입었던 지인들이 모여 들어 사오천의 무리를 얻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검은색을 칠한 박을 차고 나가 싸우게 하였다. 또한 회진回陳할 때는 쇠로 주물한 박을 길에 놓고 오게하였다. 왜적들은 쇠박을 보고 놀랐다. 병사들이 모두 쇠박을 차고도 저렇게 날렵하게 움직이는데 가히 당하질 못하게구나 하면서 겁을 먹었고 왜적들은 김천일의 의병만 보면 바람앞의 풀잎처럼 쓰러졌다. 김천일이 기적적인 공을 많이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부인이 찬조한 힘 때문이었다.> 라고 청구영언과 계서야담에 전한다. 

정사를 중심으로 김천일의 의병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1537년 나주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학문으로 조정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지방에서 현감, 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고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다 임진왜란을 맞이하였다. 그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충의의 선비였다. 관군의 연패 소식을 들은 그는 1592년5월16일 나주에서 송제민, 양산숙, 박환 등과 300여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정했다. 그때 그의 나이 이순을 바라보는 55세였다.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과 함께 호남 의병의 쌍벽을 이룬 김천일은 국왕을 보호하는 일이 의병의 핵심 임무라 생각하고 계속 북상하였다. 한편 고경명은 전주에서 북상을 중지하고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조선 선비의 기개를 떨치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는 전투의 실적은 없었지만 우리민족의 항전 의지를 보여줌으로 그후 많은 백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항전하였다.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는 달리 김천일은 고향을 떠나 전국 각처에서 관군을 지원하고 또는 연합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의 의병활동은 실질적으로 여러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남겼다. 김천일의 부대는 계속 북상을 하면서 수원의 독산성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도성부근 경기도 일대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특히 그의 부대는 왜적들에 의한 왕실의 능침도굴 방지에 크게 공헌하였다. 1593년 초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부대가 평양성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남진할 때 도로와 지세, 적정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작전을 도왔다. 

그리고 1593년2월에 벌어진 행주대첩 전투에도 합세하여 힘을 보탰다. 그리고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의 제의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이에 김천일은 조선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려는데 항의하면서 우리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자주 국방의식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왜군들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그들을 추격하였다. 

김천일의 부대는 상주와 함안을 거쳐 계속 왜군들을 추격하였다. 상주에 당도했을 때 그는 왜군들의 진주성 공격계획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요, 진주는 호남의 울타리 같으므로 의병의 못자리이며 군량의 원천인 호남을 살리기 위해서는 진주를 지켜야 한다.’ 는 판단하에 진주성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진주성에서 도절제사가 되어 관군과 의병들을 합동지휘하면서 임진왜란 중에서 가장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달 29일 성은 함락되었고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 고종후(고경명의 아들), 최경회39)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왜군들은 진주성안의 6만여명의 군관민軍官民을 학살하였다. 그들도 거의 다 소진된 전력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이상이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 중 대표적인 승병장과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활약상을 더듬어 보았다. 승군들을 이끈 승병장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하였고 그들을 따랐던 승병들은 모두 전통무예나 불무도佛武道을 연마한 무사들이었다. 또한 충의단심의 발로와 높은 기개를 가진 선비들이 일으킨 의병들도 선비들과 일반백성 그리고 많은 무사武士들이 합세하여 왜적에 맞섰다.

39)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논개의 남편 – 최경회의 본처 김씨가 논개의 재색에 감탄하여 지병으로 죽기전에 남편에게 소실로 맞을 것을 권유하였다.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유야담於于野譚’에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고 최초로 실려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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