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예의가 있다
보스톤코리아  2014-04-21, 11:47:47 
신선한 봄의 향기를 느끼며, 유달리 길었던 겨울과의 이별을 생각했다. 애써 부인하려 하지만, 엊그제 내린 눈을 보며 생태계의 이상 변화가 느껴졌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데, 그것을 잊고 오랫동안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며 살아왔다. 고마운 ‘자연’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도로와 자동차, 쉴새 없이 배출되는 공장의 대기 오염, 우리의 환경이 오염되어 가고 있다. 우리 곁으로 파괴된 자연이 돌아오고 있다. 

이별의 끝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관계의 끝 모습에 자신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라 믿었던 관계가 사랑하는 ‘척’ 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 그런 ‘용기없는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모든 허물을 상대방에게 뒤집어 씌우며, 자신만 좋은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배신감 때문에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억울함을 남기는, 예의 없는 이별이다. 이 상처는 담겨있는 그릇조차 녹일 수 있는, ‘황산’(Acid) 같다.  

마키아 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군주는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힘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여우처럼, ‘덕’이 있는 ‘척’을 하는 ‘부드러운 잔 꾀’와 사자처럼 상대방에게 혹독한 상처를 입혀 짓누룰 수 있다면, 아무리 억울해도 감히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고, 현실적인 이익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조언이다. 경영에 사용할 일을 사람과의 관계 끝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테라피 과정 중, 예의 없는 이별을 겪는 환자들은 몸과 마음이 황산같이 녹아가는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한다. 피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한다.  

“그녀(그)는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짓밟고 갔지요.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의 권리마저  빼앗아 갔어요! 소중했던 모든 추억이 부정당한 것이지요. 나의 진실했던 사랑이, 그저 그녀(그)의 생을 위한 연습용의 노리갯감이고, 희롱거리였다는 진실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합니다. 상처를 벗어나기 위해선 없던 일이 되고 없던 사람이 돼야 하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로 인해 불행한 감정의 뿌리를 뽑아 내지 않으면, 몸과 마음은 병이 들고 말 것이다. 이 분노의 독소에 묶여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리작용을 연구한 듀크대학 정신과 레드포드 윌리암스 교수는 ‘분노가 사람을 죽인다.’고 단언한다. 사랑한 죄의 댓가로 불행한 삶을 살다가 일찍 죽을 수도 있다면? 이별에 예의 없이 상처 준 이는 자신의 잘못을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억울하지 않은가?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 

가장 멋진 복수는 다시 행복을 찾는 것이다. 이 분노의 독을 없애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송봉모 신부님’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두가지 중(용서와 죄를 안 짓는일)의 하나다. 

하지만, 상처로 인한 분노의 씨앗은 ‘미움’이라는 ‘꽃’을 피운다. 매일같이, ‘분노’의  물을 주면서, ‘미움의 꽃’을 피울 것인가? 아니면, ‘용서’의 씨앗을 심어 매일같이 용서의 물을 주면서 ‘평화의 꽃’을 피울 것인가?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 그 누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용서란 주제로 철학을 연구한 네블렛 (William Neblett) 교수는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용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용서를 결심하는데 힘이 들게 하는 것이 있다. 아픔을 생각하고 싶지 않기에, 무의식으로 덮어버리게 할 수 있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그러므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떠느니, 덮어 버리면 쉬운데, 구태여 아픈 감정을 자꾸 들어낼 필요가 있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싫어, 값싼 용서로 애써 봐주거나,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러면서, 자기 안의 상처를 인식조차 못하게 된다. 상처가 들쳐지면 갑자기 화를 내며 완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행동에 의아해질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상처에서 치유되느냐 안 되느냐의 열쇠를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한테서 찾으려 하는데 있다. 그러면서 ‘용서해 주면 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없다’라고 생각 하게 된다. ‘내 자존심을 세우려면,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적대자와 동일시’를 한다. 

이 원리는 사람은 무엇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모습이 변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밤낮으로 미워한다면 어느새 그 사람과 닮게 된다는 것이다. 적대자와의 동일시가 나와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버려서 오는, 새로운 변화의 불 확실성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힘이 들어도, 용서를 결심해야 한다. 용서는 상대방과의 관계없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나를 위한 최고의 예의이자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별에 예의는 지켜주어야 한다. 나쁜 관계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고, ‘미움의 꽃’이 아닌, ‘평화의 꽃’을 피우는 관계를 남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봉모 신부님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을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양 미아  Licensed Psychotherap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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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Fruit St. Worcester, MA 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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