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36
보스톤코리아  2014-05-26, 12:07:44 
‘십팔기’ 하면 많은 사람들이 중국무술로 오인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인식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영화를 통해 중국무술이 들어오면서 대중들에게 잘못 전달된 것 같다. 긴 설명이 필요없는 질곡과 혼돈의 근현대사의 ‘보릿고개’를 지나 오면서 우리는 우리 전통무예의 연구 보다는 무술영화와 무협소설이 더 흥미있는 ‘오락꺼리’ 였다. 그리고 사실史實의 고증보다는 한 가닥의 아이디어로 창작을 하는 예술가들이 만든 픽션을 때로는 대중들이 여과 없이 받아드리면서 불행하게도 정설로 굳어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의 십팔기는 사도세자가 영조 25년(1749년)에 훈련도감 교련관 임수웅과 함께 18가지의 무술, 즉 ‘무예제보’에 실려있는 6기인 곤방,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에 12기를 더하여 지상무예18기인 ‘무예신보武藝新譜’ 를 편찬하였다. 이 무예신보는 전하지 않으나, 그 후 정조 14년에 박제가, 이덕무, 백동수 등이 왕명을 받들어 이를 계승하고 보완하여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에 그림과 함께 소상히 전하고 있다. 이 무예신보를 정리한 사도세자는 영조를 대신하여 15세 때 서정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세자이다. 

조선시대의 역사 속에서 많은 왕자들이 왕자라는 이유로 정쟁에 휘말려 참혹한 죽임을 당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당당히 차기 보좌에 오를 세자들도 많이 죽임을 당했다.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에서 죽은 의안대군(이방석 – 이성계의 8남, 막내아들)으로 부터 일본에 유학이라는 명분하에 인질로 잡혀간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까지 수 많은 왕세자들이 비운의 죽임을 당했다.(영친왕 이은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그 해 12월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갔다. 1910년 국권상실로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되었고, 1920년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의 맏딸 마사코(方子)와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정략결혼을 했다. 1926년 순종이 죽고 형식상의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어도 귀국하지 못했고, 또한 일본의 패망으로 황족의 특권도 상실되었으며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지내다가 1963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1970년 74세를 일기로 죽었다.) 

사도세자의 부친인 영조는 적장자가 없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자식이 없이 1757년 66세를 일기로 죽고 나서, 1759년 영조가 66세의 나이로 15세의 김한구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녀가 정순왕후 김씨이며, 계비 김씨 역시 자식이 없다. 앞서 영조는 후궁인 정빈 이씨의 소생 효장세자(진종)를 세자로 책봉했으나 1728년 1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리고 나니 왕자는 영빈 이씨의 두살난 아들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영조가 마흔이 넘어 출생한 사도세자는 2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는 3세 때에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도 ‘동몽선습’을 독파할 정도로 영리하였으며 10세 때는 소론이 노론을 제거한 ‘신임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판단력도 있었다. 

그리고 15세가 되어서는 영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다. 그가 부왕을 대리하여 서정을 하자 남인, 소론, 소북세력들이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는 기세를 보였고, 사도세자를 싫어하던 노론세력들이 후궁 숙의 문씨와 후에는 김한구의 딸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세자를 무고하였다. 이에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 영조는 세자를 자주 불러 심하게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면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 들이고, 또한 몰래 궁을 빠져나가 관서지방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1762년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 비행 10조목’ 상소를 올렸다. 

이에 분개한 영조가 세자를 창경궁의 휘령전(현재의 문정전)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이에 불응하자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한 다음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그는 8일째 되는날 죽었으며 그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 후 영조는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면서 생각할수록 서럽다는 뜻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조정은 소용돌이를 치면서 그 후의 조선왕조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을 당연시한 ‘벽파’와 동정한 ‘시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즉 훈구파와 사림파로 시작된 당쟁이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에서 바야흐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의미로 노론의 일부와 소론과 남인세력이었고,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마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대립세력으로 노론의 대다수였다. 벽파는 정조대에서는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1800년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등극하게 되니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시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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