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시절
보스톤코리아  2014-06-16, 11:51:54 
  초여름인데, 보스톤은 한창 좋은 시절이다. 춥지도 않으며, 덥지도 않다. 습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다. 청명하기가 이를데 없다. 참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참 좋은 시절은 짧다. 

보스톤에 한창 좋은 시절을 즐기고 계신지?
  군정에서 민간정부로 이양되면서, 대통령선거가 있던 그해 초여름이다. 우리 식구들은 시골에서 올라왔다. ‘도라쿠’ (트럭, 내 어머니는 그렇게 불렀다)에 가구들을 싣고, 밤에 도착했는데 동네엔 아카시아 향내가 진동했다. 새로 이사온 동네는 중고등학교 근처였는데, 학교담을 아카시아 나무로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주렁주렁 흰 아카시아 꽃덩어리로 피어난 꽃들은 그 향기가 떼지어 몰려 다녔는데, 코가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진했던 거다. 따서 맛보던 큰 꽃잎 밑동은 달콤했는데, 그게 ‘아카시아 꿀’이었다. 아아, 쌀나무(?)에 흰 쌀밥처럼 보였던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더만. 초저녁이면 한낮동안 퍼졌던 향내가 극에 달했는데, 그 향기에 취해, 벌들도 아마 기진했을지도 모른다.

  아카시아를 한참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났다. 한국군 졸병시절이다. 토끼를 키웠는데, 토끼는 아카시아 잎사귀를 잘 먹었다.  졸병이니, 군토병軍兎兵되어 토끼먹이를 넣어 주어야 했다. 짬밥을 넣어 줄 수 없으므로, 아카시아 잎사귀를 따다가 넣어 주곤 했던 거다. 하지만 군토병의 정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끼는 장렬히 전사했다. 하긴 토끼장이 토굴이었으니, 통풍이 제대로 됐으리 없다. 한창 여름에 습기찬 우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거다. 한창 아카시아가 피는 계절이었다. 

  아카시아를 보스톤에서 몇일전 또다시 만났다. 그날 일이 있어 파킹랏에 자동차를 대면서, 코에 익었던 냄새가 스쳤다. 냄새는 잊었던 냄새였는데, 얼핏 내 후각을 일깨웠던 거다. 어디서 맡아 본 냄새더라? 잠시동안 멍멍했는데, ‘아아, 아카시아다!’ 방범등에 슬핏 비쳐진 하얀 꽃덩이들이 내 후각의 기억과 함께, 시각이 한 도움줬던 거다. 냄새에 이끌려 당연히 가까이 다가 섰고, 코를 들이 밀었다. 그래, 이 냄새다. 냄새는 어릴적에 맡던 것에 비해 덜 진했다만, 그건 아카시아의 독한 향내였다. 차라리, 내게 그 냄새는 너무 진했기 때문이다.

법당 창이 훤히 열리고 
향촛대에 아카시아 향이 
가득하다. 

부처님의 재치기를 
큰스님은 
듣지 못했다.
(진의하•시인, 아카시아꽃 중에서)

  무심코 스쳤던, 그 나무들이 그 꽃이, 어릴적 내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나이가, 세월이 다시 일깨워 놓았던 게다. 이제, 아카시아 향내를 맡고, 초여름을 맞는다. 그럴리야 없겠다먄, 내 인생은 아직도 초여름인가. 그건 궤를 같이한 어린 시절의 꽃이다. 어린 코를 간지리던 향내인 게다. 이제 다시 냄새를 맡을 적에,  인생은 가을인데, 마음과 코만은 여전히 초여름이다. 그래도 ‘참 좋은 시절’ 아니던가. 헌데 미제美製아카시아 꿀은 당도당도가 낮은가? 아니면 내 입맛이 너무 단것에 길들여 졌던가. 달기가 여엉 옛 시절만도 못하다.

  참, 아카시아에도 앨러지가 있단다. 하긴 뭔들 앨러지가 없으랴만, 앨러지 잘못 걸리면 장난 아니다. 모두 조심조심 하시기를 간절히 빈다. 재채기에 콧물에, 가려움증까지 없는게 없다. 그리고 미제 아카시아는 한국산 아카시아에 비해 향내가 덜한 듯 싶은데, 확실치는 않다. 아카시아 향기 퍼지는 참 좋은 시절이다. 성경에 아가편은 참 연애편지도 이런 간지러운 표현은 없을 게다. 연애하기 참 좋은 시절인게다. 

 ‘포도꽃 향기 풍기는 철이오.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나와요.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아가 2:13, 공동번역)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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