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62
보스톤코리아  2015-01-05, 10:04:15 
이번에는 ‘무덕관’에 대해서 살펴 본다.98) 
무덕관武德館은 해방 직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운수부(교통부) 청사에서 황기黃琦에 의해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1946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황기 관장은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서 그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기의 무력武歷을 방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서 일부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용산의 운수부 청사를 사용했고 관원의 대부분이 철도국 직원들이어서 ‘철도국 도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수련생들은 관번 1번인 김운창을 비롯하여 홍종수, 최희석, 유화영, 남삼현, 김인석, 이복성, 황진태, 원용법, 정창영, 이강익 등으로 모두가 철도국 직원이었다. 그후 철도국을 통해 각 지방의 기차역 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가 무덕관 하면 기차역이 연상될 정도였다. 무덕관의 승급심사 때는 청도관의 이원국 관장과 송무관의 노병직 관장이 왕래하면서 교분이 두터웠다. 

하지만 때로는 단증과 급증 발급을 놓고 왕왕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그로 인한지는 몰라도 무덕관과 청도관은 서로 라이벌관계를 유지하면서 초창기 무술을 발전시켰다. 황기는 1953년에 ‘대한당수도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5년 서울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새로이 개관하면서 그 해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개관하였다. 또한 같은 해 한중 친선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면서 우리의 무술을 중국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황기는 홀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수련하면서 1960년에는 대한당수도협회를 ‘대한수박도회’로 개칭했다. 하지만 그의 야심찬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바탕으로 한 수박도의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공권력의 벽에 부딪히면서 좌절의 쓴맛을 본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모든 관館이 ‘대한태수도협회’로 통합되면서 ‘1인 무왕武王’이 이끌던 모든 ‘관’들은 해체되었다.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이 아니라 단증을 통합적으로 일괄 발급하였지 수련상이나 내용면에서는 각 관의 전통을 유지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다. 정부에서 모든 관들을 하나의 협회로 통합하라고 지시를 하였을 때 황기는 반기를 들었다. 

결국 무덕관 내분이 일어나는 소요사태를 겪으면서 1965년 3월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되어 황기를 무덕관에서 제명하고 통합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으나 얼마가지 않아 물러나고 그의 뒤를 이어 홍종수가 관장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오세준이 관장직을 이어갔다. 무덕관은 5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

해방 후 민간 도장의 5대 문파는 청도관, 무덕관, 지도관(조선 연무관), 창무관(YMCA 권법부), 송무관 등이다. 이 5대 문파의 관장 중 실종된 전상섭, 윤병인을 제외하고, 청도관의 초대 관장 이원국, 2대 관장 손덕성, 무덕관의 초대 관장 황기, 창무관의 2대 관장 이남석, 송무관의 초대 관장 노병직 등 이른바 ‘관’의 ‘원조’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여기에다 한국 전쟁 후 만들어진 군대 도장 오도관의 초대 관장 최홍희와 역시 오도관의 관장을 역임한 남태희도 포함된다.(최홍희는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우리나라 태권도의 뿌리들이 사실은 미국에 모두 옮겨져 있는 셈이며, 미국에서 굳건히 내린 뿌리는 후일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다음은 ‘지도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이 부분 역시 ‘태권도 현대사 – 강원식, 이경명 공저’를 참고하였다). 지도관智道館은 전상섭이 1946년 3월 3일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 공수도부’로 출발하였다. 전상섭은 청소년 시절 유도를 수련하였다. 그리고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배웠다. 1943년 귀국한 그는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쳤다. 그 후 해방이 되자 그는 곧 ‘조선연무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수련생을 모집하였다. 

해방직후 조선연무관은 무급에서 8급까지 상, 중, 하로 나누어 관원들을 지도했고 관번은 입관일만을 기준하지 않고 ‘급級’도 고려하였다. 
전상섭은 호리호리한 체격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지만 지성인답게 늘 정장차림으로 다녔다. 그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납북)이 되었고 ‘조선연무관’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래서 당시 지도 사범으로 있던 윤쾌병尹快炳이 이종우와 함께 명칭을 ‘지혜로운 길’을 의미하는 ‘지도관智道館’으로 관명을 개칭하였다. 

98) 참고 문헌: 태권도 현대사(강원식, 이경명 공저, 보경문화사, 1999), 태권도지도이론(김대식, 김광성 공저, 나남, 1987), 태권도의 역사 – 네이버 지식iN.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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