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3. 유럽인들의 정착촌 건설 (4)
보스톤코리아  2015-07-20, 14:54:45 
북동부 식민지 정착민과의 첫 전쟁 (계속)
1970년대 초 코네티컷 주의 레드야드(Ledyard) 인디언 보호구역에 퍼쿠어트족 출신 인디언이 딱 한 명 살고 있었다. Elizabeth George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였는데 1973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연방정부에 의한 부족국가 지위 인정이 취소되었는데 그녀의 손자인 Richard Arthur Hayward의 노력으로 1983년에 다시 연방정부인정을 받아냈다. 그는 대단한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1992년에 인디언보호구역안에 서반구에서 가장 큰 카지노(Foxwood Casino Resort)를 건설하였다.

필립왕 전쟁
필립왕이라고도 불리는 왐파노아그 부족의 추장 메타코멧 (Metacomet)은 유럽으로부터 정착민들이 계속적으로 밀려들어오고 이들 유럽인들이 더 많은 토지를 요구해 옴에 따라 인디언 부족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675년 전쟁을 일으키기로 생각하여 정착민 소유의 한 농가를 약탈하였다. 당시 유럽으로부터의 이주민은 8만 명에 달한 반면에 왐파노아그 부족의 인구는 전염병 등의 원인으로 만 명 수준으로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수년간 지속되었으며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럽인들에게는 적수가 될 수 없었던 왐파노아그 부족의 완패로 끝맺었다. 이 전쟁에서도 모히건 부족등 일부 인디언 부족은 영국군과 연합하여 왐파노아그 부족과 싸웠다. 이 전쟁 중 추장인 필립왕은 기도하는 인디언(Praying Indian; 기독교로 개종하여 유럽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인 인디언)인 앨더만(John Alderman)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그의 시신 중 머리 부분은 따로 잘려져서 20년간 전시되었다고 한다. 1678년에 끝난 이 전쟁으로 영국 연합군 측은 약 600명, 왐파노아그 부족은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쟁에서 진 왐파노아그 부족 생존자 중 수백 명은 전쟁이 끝난 뒤에 처형되었고 추장의 부인과 아들을 포함하여 나머지 왐파노아그 인디언들은 버뮤다 섬의 노예로 팔려갔다. 

뉴 네덜란드와의 전쟁
현재 미국의 뉴욕과 뉴저지와 코네티컷을 아우르는 뉴욕권역은 네덜란드인들이 1600년대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진출하였다. 초기의 20여 년 동안에는 큰 충돌 없이 네덜란드 인들과 그 지역의 레나페(lenape) 인디언들은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피 교역 등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키프트(Willem Kieft)가 정착촌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양측의 긴장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키프트 는 주민대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3년 파보니아 인디언 마을을 급습하여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2년 이상 지속된 키프트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00명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당시의 뉴 암스테르담 인구가 채 1000명이 안됐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1645년 인디언들과 네덜란드인들 간에 회복된 평화는 다시 깨져 1659년부터 1663년까지 레나페부족의 한 지파인 에소푸스(Esopus)와 네덜란드 식민지 간에 다시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네덜란드 식민지는 인근의 원주민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아 온 데다 수십 년간 지속된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세계무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에서 네덜란드가 영국에 밀림에 따라 1664년에는 뉴암스테르담을 영국 측에 양도하는 등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경영에서 물러서게 되었다.

스웨덴도 식민지 건설 시도
북미 대륙에 식민지 건설을 추진한 나라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외에 스웨덴도 있었다. 스웨덴은 1638년 오늘날 델라웨어 주 최대 도시인 윌밍턴이 서 있는 자리에 당시 스웨덴 여왕의 이름을 딴 크리티나(Chritina) 요새 건설을 시작으로 델라웨어 강을 따라 뉴 스웨덴으로 불리는 식민지 개척 사업을 벌였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북쪽으로 펜실베이니아까지 이르기도 하였으나 인근 뉴저지와 뉴욕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뉴 네덜란드와의 경쟁에 밀려 1655년에 뉴 네덜란드에게 흡수 통합되었다.

4.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
비버 전쟁(1640-1701)
흔히 이로쿼이 연합(Iroquois Confederacy)으로 불리는 부족은 1600년대 초부터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 내륙으로 진출한 네덜란드인과의 야생동물 모피교역으로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얻어왔다. 그린데 총을 이용하여 사냥을 하다 보니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이로쿼이 인디언들은 전통적인 자신의 사냥터를 벗어나 오대호 주변 깊숙이 다른 인디언들의 사냥터를 침범하게 됨으로써 부족 간 충돌이 발생하였다. 교역 대상 모피 중에는 비버 모피가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역사적 갈등을 ‘비버전쟁(Beaver Wars)’이라고 부른다. 이로쿼이 연합은 그들의 교역파트너인 네덜란드로부터 총포 등을 지원 받은 반면에 주로 알곤킨어족에 속하는 상대 인디언들은 그들의 교역 파트너인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프랑스 이로쿼이 전쟁(French and Iroquoi War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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