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러브 스토리
보스톤코리아  2015-10-26, 12:05:32 
  정녕 가을이다. 사랑이야기를 만들기 좋은 계절이다. 보스톤은 가을도 황홀하다만 너무 짧다. 사랑은 아름다운데 너무 짧아 마냥 아쉬운거다. 보스톤의 가을을 즐기시는지?
  칠십년대 초반이다. 케이비에스 주말의 명화를 흑백으로 볼 적이다. 개봉영화 상영관에서는 영화 ‘러브스토리’가 상영됐다. 국제극장이던가? 극장입구엔 커다란 간판이 걸렸을 게다. 갈색 장발의 젊은 라이언 오닐 가슴에 비운悲運(??)의 여주인공 제니가 기대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개봉관에서도 동시상영관에서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극장 간판만은 또렷히 기억한다. 지방 고등학교에 다닐 적이었으니 말이다. 세월이 한참 지난후, 미국에서 비디오로 봤던가?  그 시절 한국 동시상영관엔 지린내났고, 필림은 자주 끊겼다. 화면에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게다가 빨리 스쳐가는 자막을 따라 읽기가 어려웠다. 자막은 화면 오른편에 황금색 세로로 씌여져 있었더랬다.

  내게 소설 러브스토리는 영화가 책보다 낫다. 미국에 와서 몇 년 지난 다음이다. 헌책방에 들렀다가 러브스토리의 작가 에릭시걸을 만났다. 그의 책 페이퍼백(문고판) 몇 권을 집어들었다. 그 무렵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가있었다. 게다가 연휴가 겹쳐, 뚜렷하게 할 일이 없었다. 구해 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황금과 같은’ 긴 휴일을 즐긴 거다. 대충 끼니를 해결하며 읽어 댔다. 소파에 누워서 읽고, 침대에 엎드려 읽고, 거실에 앉아 읽었다. 새벽에도 읽고, 한낮에도 읽었고, 늦은 밤에도 읽었다. 이 책이 지루하면, 저걸 들고 읽었다. 이틀 후 늦은 오후에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다. 쏟아지는 가을 햇빛에 헛구역질이 일었다. 오랜만에 햇빛을 봤기 때문이다. 

  영화 ‘러브스토리’는 보스톤이며, 하바드이고, 눈雪이다. 영화 속에서 눈雪장난하는 장면이 떠오르시는가. 배경음악도 삼삼했지 싶은데, 연애는 춥지도 않다. 추워도 추운 줄 모르는 거다. 영화 ‘러브스토리’가 겨울이라면, 내 연애는 늦가을이고 낙엽이다. 그해 시월말 경, 아내에게 작업을 걸었고 밀당이 있었다. 가을 같은 연애는 시작된 거다. 덕수궁에 갔고, 옛날식 다방과 삼청공원과 무교동 낚지집과 칼국수집에도 들렀으며, 광화문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그러니 우리 연애와 광화문 주변은 가을에 더 각별하다. 러브스토리가 캠브리지와 겨울과 눈雪이듯 말이다. 그해 가을과 겨울 나와 아내는 춥지 않아 오히려 따뜻했다. 

  아내에게 말장난을 걸었다. 라이언 오닐보다 내가 낫지 않냐? 청년시절 그런 소릴 이따금 들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가 곱슬에 색깔은 온전히 검은 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미美청년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 마시라. 아내의 반응은 말하지 않을란다. 말같지 않은 소리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내가 제니냐? 라고 되묻는듯 했다. 백혈병으로 아파야겠느냐고 반문하는듯 했던 거다. 하긴 한동안 소녀들에게 백혈병이 유행처럼 유령처럼 돌아 다녔다. 돌림병도 아닐텐데, 환각세계의 병이었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을 닮고 싶었던 터. 몸도 마음도 열에 달뜬 듯 어지러워 현기증나던 시절이었다.  

  러브스토리 영화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시는가?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예요). 사랑이 정녕 미안함과 상관 없다 해도, 여전히 미안한 걸 어쩌랴. 정호승 시인이다. 

미안하다/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중에서, 정호승) 

"주여, 죄송합니다”(출애굽기 4:10, 공동번역)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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