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05
보스톤코리아  2015-11-09, 11:53:03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 그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에게 더 말할 나위없이 필요한 사람들, 화랑세기에 나오는 이 김대문의 미사여구는 김부식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두 군데나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당시 인종 치하의 고려는 어수선하였다. 14세의 어린나이에 등극하였으나 외조부(장인도 됨) 이자겸의 전횡으로 왕 노릇도 못하고 이자겸의 집에 갇혀 있기도 하였다. 인종은 최사전과 척준경의 도움으로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귀양보내고 겨우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묘청의 서경천도와 칭제건원稱帝建元 주장이 당시 중국 북부에 위치한 금나라의 견제를 받자 김부식 등이 묘청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묘청은 인종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1135년(인종 13년)에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이 난은 김부식에 의해 평정되었다. 그리고 김부식은 개경내에서도 또 다른 정적인 정지상 등의 일파를 제거하였다. 이러한 정난을 겪은 김부식은 국사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현좌충신 양장용졸’이 아니었겠느가! 그리고 관료들에게 유교사상과 함께 화랑도의 정신을 주입시켜 나갔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다. 즉 삼국사기가 집필될 무렵에는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어느 문헌에도 참고했거나 존재한다는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1989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것은 원본이 아닌 필사본으로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5.9 ~ 1962.3.6)가 원본을 보고 베꼈다는 ‘필사본’이다. 박창화는 1933년 부터 일본 궁내청 도서료 촉탁직으로 근무할 당시 화랑세기를 필사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졌던 화랑세기가 850년이 더 지난뒤 필사본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은 고대사의 사료가 빈약하여 연구하기가 힘든 사가들에게는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인데, 이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신라 역사는 고려인이 쓴 기록이지만,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기록한 신라의 역사이다. 이 필사본이 위서라고 주장하는 노태돈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도 “만약 이 책이 진본이라면 그것은 사료 부족에 허덕이는 고대사 연구에 백년대한百年大旱의 단비와 같은 것으로, 필사본 ‘화랑세기’의 출현은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했다. 문제는 진본을 보고 ‘필사’를 했느냐?, 아니면 박창화가 ‘소설’을 쓴 것이냐? 가 쟁점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2월16일 부산 국제신문을 통해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신문에도 공개되었다. 처음 공개될 당시의 32쪽 짜리 필사본의 소장자는 경남 김해시에 거주하는 김경자였다.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한몸에 받은 필사본은 공개 직후 문화재감정위원들과 사학자 등 고대사 권위자들의 검증을 받았다. 그들은 이 필사본의 위작 가능성을 제기하였으며 곧 위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즉, 고매한 사학자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인용한 화랑세기의 문구 ‘현좌충신 양장용졸’과 열전에 나타난 화랑들의 용맹한 활약상들로 가득찬 내용의 화랑세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필사본의 내용 가운데는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그것과 비슷한 점,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용어(다른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용어들 – 모계, 풍월주, 전주 등), 필사본에서만 나오고 차후 금석문 등에서 교차 검증이 안되는 인물들(특히 울주 천전리 각석에 남아있는 수 많은 화랑들의 이름 가운데 한명도 교차 검증이 안됨), 또한 필사본에서는 다른 인물로 나오는 용춘과 용수가 고고학적 발굴로 같은 인물로 확인됨. 즉 1966년에 수습되어서 1972년에 판독한 ‘황룡사9층 목탑 찰주본기’와 삼국유사의 교차 검증으로 용춘과 용수는 동일인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에도 ‘ㅊ’와 ‘ㅅ’의 이표기가 많이 나오면서 동일인임을 뒷받침한다.(대표적인 예가 흠춘/흠순, 그리고 관창/관상 등 이들은 동일인이다) 그리고 김해 김씨의 가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상이하다. 이상의 중요한 몇가지가 위서론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의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사학계를 대표하는 진영 중에서 노태돈 교수를 중심으로 한 서울대학파는 위서론을 주장하고, 이종욱 교수를 중심으로 서강대학파는 진서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등 그 외의 사학자들은 진위서의 의견을 밝히거나 유보하고 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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