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12
보스톤코리아  2016-01-04, 11:35:29 
신라 21대 소지왕(재위기간 471 ~ 500)은 할아버지 눌지왕이 고구려에 반기를 들고 대내적으로 체제정비와 왕권강화를 공고히 한 위업을 이어받아 그 역시 상당히 중요한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고구려로 부터 받은 잦은 침략으로 재위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파상적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가야는 제압되었고 백제와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침에 공동대처를 했지만 장수왕과 문자왕(장수왕의 손자, 아들 고조다高助多가 일찍 죽어서 손자가 왕위를 이었다. 사실은 장수왕이 98세까지 아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시대의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며 인접국과 전쟁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의 소지왕조에는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대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소지왕이 날이군(현 경북 영주)의 아름다운 벽화를 찾아간 장면을 그려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사실 처음에는 소지왕이 날이군으로 순시를 간 것이지 벽화를 찾아간건 아니다. 당시 날이군은 신라의 변방이었다. 소백산맥의 죽령을 경계로 고구려와 맞대고 있었고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군사들이 주둔하여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지방토호는 친고구려 성향이었다. 그래서 중앙의 왕은 날이군이 변방이지만 군사요충지인 만큼 직접 방문하여 이 지방을 다스리는 토호세력과 백성들을 위로해주고 이 지역이 신라의 통치영역임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와 동시에 날이군의 파로는 왕의 행차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알려진 자신의 딸 벽화를 바쳐 충성을 맹세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까지 왕은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벽화를 한 번 보고 왕성으로 돌아간 왕은 그녀의 미모에 상사병이 걸려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영주까지 평민의 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사랑을 불태우다가 종래에는 왕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벽화의 어머니 벽아도 함께 데려가서 후궁으로 삼았다. 

고타군(현 경북 안동)의 노파도 또한 그냥 ‘늙은이’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사회적인 백성의 삶보다는 더 깊은 정치적인 암시가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 신라의 북쪽에서 서로 접경을 이루고 있는 두 지역 안동(고타군)과 영주(날이군)는 성격을 달이하는 지역이었다. 안동은 전통적으로 신라에 귀속되어 있었고 영주는 자주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에 친고구려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고타군의 노파는 신라중앙왕실에 협조하는 친신라토착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변복을 했지만 왕이 아무데나 유숙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한 아무나 (변복을 했다지만) 왕에게 조언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내적인 정사도 잘 펼치며 대외적으로도 고구려의 지속적인 침공에도 용감하게 맞섰던 군주가 벽화를 왕궁으로 데려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죽었고 또 왕위계승서열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던 방계왕족인 지증이 권좌에 오른 것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아마도 지증왕은 이런 비정통성을 합리화하고, 당시 권력의 상징인 ‘성기의 크기’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큰 옥경(임금의 성기를 높혀 부르는 말이며 그의 크기는 45cm였다)에 맞는 왕비를 찾는다고 공고를 하였을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1왕비는 소지왕의 후궁이었던 연제부인이었다. 

다시 화랑세기 대역 원문의 서문으로 돌아간다.
[옛날에 선도는 다만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했는데 국공들이 무리에 들어간 후에는 서로 도의道義를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진흥왕조와 김흠운전에 걸쳐 두번이나 인용한 김대문의 미사여구, 이 문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군주와 통치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 들만 있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군주도 나라를 통치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통치자가 영민하다면 태평성대를 누리며 백성들의 삶은 평화롭고 풍요로우리라~. 지난 반만년의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과연 몇 명의 영민한 군주가 현좌충신과 양장용졸들을 데리고 백성들을 풍요롭게 했을까? 
화랑세기는 김대문의 아버지 오기공과 김대문이 지었다. 김대문의 가문은 대대로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를 배출하였다. 그래서 가문의 지위를 밝혀주는 화랑의 세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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