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6. 기숙학교를 통한 인디언 동화정책 (4)
보스톤코리아  2016-07-18, 15:12:13 
루터 스탠딩 베어(Luther Standing Bear) (계속)
이 소식은 버밍햄 신문들이 주요 뉴스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빌 코디의 제안에 따라 쇼 중에 산모와 아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특별히 만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신생아에게 돈을 주어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영국 공연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와 1903년 새롭게 계약을 맺고 미국 내 공연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리노이에서 4월 7일 대형 열차 사고가 발생했다. 세 명의 젊은 인디언이 사망하고 루터도 크게 다쳤다. 그 뒤로 루터 가족은 빌 코디 쇼에 출연하지 못하였다.

파인릿지로 돌아온 루터는 1905년 7월 4일 오글라라 라코타의 추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인릿지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있던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아이오와의 수우시티(Sioux City)로 이사했다. 1912년에는 다시 아이오와에서 캘리포니아 할리우드로 옮겨갔다. 거기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헬렌 헌트 잭슨 여사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라모나(Ramona, 1916년 작) 등 십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인디언 배우들의 권익 신장을 위하여 크게 노력하였다. 영화 속에서 인디언들의 모습이 잘 못 그려지는 일이 없도록 영화 제작자들에게 촉구하기도 하고 인디언의 배역에는 반드시 인디언 배우를 캐스팅해 줄 것도 요청하였다. 인디언 출신 스포츠 영웅인 짐 소프(Jim Thorpe)가 중심이 되어서 인디언배우협회를 결성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 그의 첫 저서 ‘나의 수우족(My People the Soiux)’이 발행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인디언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모르고 있던 백인들에게 인디언의 전통과 문화를 알리기 위하여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고 강연을 여는 등 큰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 그 무렵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e)에서 작성한 ‘메리암 보고서(Meriam Report)’도 발간되어 강제적인 인디언 동화정책은 잘못된 정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루터는 1934년까지 네 권의 책을 더 펴냈다. 루터는 저서와 언론기고 그리고 강연을 통하여 인디언들도 자랑스러운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들을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디언의 자치권의 확보는 물론이며 전통 신앙과 축제도 존중되어 계속 유지 발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도스법(Dawes Act)에 의한 토지할당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13장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그는 동생 Henry Standing Bear와 함께 크레이지 호스의 석상 건립을 추진하였다.

짐 소프(Jim Thorpe)
칼라일 학교는 수많은 인디언 인재들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한 걸출한 스포츠 스타가 있었다. 알곤퀴언 어족(Algonquian language family, Algic이라고도 함)에 속하는 소크(Sauk, Sac and Fox)부족 출신의 소프(Jim Thorpe)라는 만능선수가 그 사람이다. 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5종경기와 10종경기 두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ABC스포츠에 의하여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선정되었다.

소프의 부모는 둘 다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그는 쌍둥이 형제인 찰리(Charlie)와 함께 오클라호마의 소크족 거주지역 학교에 입학했다. 소프가 그 학교에서 도망쳐 나오기를 반복하자 소프의 부모는 그를 멀리 캔사스의 기숙학교인 하스켈(Haskel Institute)로 보냈다. 얼마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소프는 실의에 빠져 있다가 아버지와 몇 차례 언쟁 끝에 집을 떠나 말 목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04년 그의 나이 16살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상의한 후 칼라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칼라일에는 워너(Glen Scobey Warner)라는  유명한 미식축구 코치가 있었는데 소프의 재능을 알아본 워너가 소프를 잘 지도하였다. 그해 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낙담한 소프는 칼라일을 자퇴하고 농장에서 몇 년간 일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칼라일로 다시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1907년부터 높이뛰기를 포함하여 모든 필드와 트랙경기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육상종목 외에도 미식축구, 야구, 라크로스(lacrosse) 등 구기 종목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심지어 볼룸댄스(ballroom dancing)에서도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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