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27
보스톤코리아  2009-10-05, 16:20:13 
발해국의 건국 동기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나라 황실 내부에 있어서의 갈등부터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당나라 제 5대 황제 중종의 황후는 위씨였다. 위씨황후는 부군 중종이 일찍이 생모인 측천무후에 의하여 폐위되어, 유폐생활을 할 때 부군을 도와 황제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한 내조가 지대하였던 황후이다.

중종은 위 황후의 도움을 받아 병석에 누워있는 측천무후를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내놓게 한 다음 다시 황제의 옥좌에 오른다. 그런데 중종이 다시 황제가 된 후로 위 황후는 자기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그 재위 5년인 서기 710년에 중종을 독살하여 그리고 자기의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는 스스로 황태후가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

중국의 역사는 앞서 측천무후의 소위 무주(武周)와 위황후의 정난(政難)을 한데 묶어 무위지환 (무위지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종이 위 황후에 의하여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생 예종이 자기아들 융기(隆基)와 함께 거사하여 형수인 위황후를 살해하고 위씨일족을 멸한 다음 아들 윤기의 도움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제 6대 예종 황제이다.

당 예종은 황제의 옥좌에 오른 즉시 사신을 진나라에 파견하여 진나라의 태조 대조영을 발해국 왕에 책봉하는 동시에 홀한주 도독에 임명한다는 조서를 보냈다. 예종이 그렇게 급하게 사신을 대조영에게 보내 대조영을 발해국 왕으로 책봉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돌궐의 끊임없는 침입에 대비하고 그 동안 당 황실내부의 변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글안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조영이 아버지 걸걸중상을 모시고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당나라에 항거하였던 일이 있다. 이 때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그를 달래기 위하여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책봉하였던 것이다. 대조영은 건국 후 그 사실에 근거하여 처음 그 국호를 진(震)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 예종이 진 나라의 대조영을 발해국 왕에 책봉하고 겸하여 홀안주 도독으로 삼는다는 조서를 받고 그것이 별로 나쁠 것도 없어서 예종의 호위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그 국명을 발해국(渤海國)이라 개칭하였다. 당나라의 예종은 진나라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여 화평을 체결한 다음, 셋째 아들 융기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

융기는 그 인품이 총명하고 용감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더욱이 위황태후를 물리치고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한 일등 공신이다. 그리하여 융기는 두형을 물리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서기 712년에 아버지 예종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윤기가 개원의치(開元의 治)로 유명한 당나라 제 7대 황제 현종이다. 당나라는 이 현종의 치세인 개원(서기 713- 741년) 연간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꽃을 피운 전성시대를 연출한다. 여기서 개원 연간의 정치발전을 새삼 논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당나라의 현란한 문화의 일면은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반용의 <당시선(唐詩選)>에 보면 이백(李白), 두보(杜甫),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왕창령(王昌齡) 등 유명시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백과 두보가 가장 으뜸가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양인대작 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
일배일배 우일배(一杯一杯又 一杯)
아취욕면 군차거(我醉欲眠君且居)
명조유의 포금래(明朝有意 抱琴來)
둘이 맞대작하는데 산꽃이 피었구나
한잔한잔 또 한잔
나 취해 졸고 있으니 그대 가려는가
내일 아침 생각 있거든 거문고 안고 또 오게나(필자 번역임)

*흔히 부(復) 일배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주선(酒仙) 이라고 일컫는 이태백의 시이다. 세상 일에는 관심이 없어 한가로이 자연 속 에서 노니는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정취를 그대로 표현했다고 할까. 성당(盛唐)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대표적인 당 시이다.

이백의 이 시는 너무나 유명하여 세계각국으로 번역되어 널리 회자 되고 있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읊어지고 있지만 한시는 원문 그대로 읊어야만 흥취가 더하다는 것이다. 개원의치로 높이 평가 받던 당나라 현종은 그 후반에 요염한 양귀비 자태에 빠져 정치는 돌아보지 않고 탐욕과 사치를 일삼다가 그만 안록산의난을 자초하여 몰락하고 만다.

양귀비와 안록산의 난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고 먼저 발해의 건국과 그 성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당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발해의 대조영은 그 세력을 신장하여 요동반도를 아우르고 동시에 부근의 약소국인 부여, 옥조, 예맥 등을 통합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대조영이 발해국을 창건한 것은 결코 일시적 영웅 심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요서의 영주에 거주할 때부터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아 고구려의 유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안전한 생활을 영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큰 뜻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글안의 이진충이 서기 696년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자 그 기회를 타서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고구려의 재건을 의미하는 진국의 건국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발해국 제 2대 무예왕이 서기 720년 일본의 세이무 천황(聖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서 "복 고려구거 유부여지 유속(復高麗舊居 有扶餘之遺俗-풀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적 풍속을 되찾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것이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확실히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해국이 유민인 정안국의 왕 오현명(烏玄明)이 서기 980년 송나라 태조에게 보낸 국서에서도 "신본이 고려구양 발해 유예(臣本 高麗舊 壤 渤海 遺裔)" 라고 하여 발해국의 유민으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백린(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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