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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의미 : 말보다 진한 몸짓
보스톤코리아  2009-12-07, 16:33:37   
간만에 따라나선 산행이었습니다. 기대와는 약간 달랐던 박사과정 생활은 정신적 실망과 육체적 바쁨으로 이어졌고, 결국 두 달 정도 산행을 쉬었었습니다. 이제 대학원 생활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랐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산이 겨울이라는 옷으로 갈아 입기 전에 한번 더 산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집결지에 도착해 오랜만에 뵙는 산우님들께 꾸벅 인사하고 손을 내밀자, 로한님께서 무슨 소리냐는 듯 두팔 벌려 힘껏 안아주셨습니다. 그 하나의 몸짓만으로도 다시 산행길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산은 역시 또다른 무게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통천문 (通天門, 하늘로 통하는 문)
저와 함께 하숙하시는 충남대 교수님과 보스톤산악회에 처음으로 등장한 저의 동갑내기, 이렇게 신입회원 2명 포함 26명의 산우님들이 뉴햄프셔에 위치한 Mt. Morgan으로 향했습니다. 서너 시간에 불과했던 등반이었지만, 그 과정은 사뭇 역동적이었습니다. 5월의 푸르름도 10월의 붉음도 잃은 채 산위에 나뒹구는 낙엽 위로 쏟아진 전날의 비는 한순간만 방심하면 우리를 넘어뜨리려 애쓰는 듯했습니다. 무심결에 진흙탕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기도 했지만, 비 온 뒤 더욱 맑아진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11월의 단아한 햇빛에 취하니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 없었구요. 이번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정상을 앞두고 올라간 사다리와 바위터널이었습니다. 암벽등반을 방불케하는 세 개의 가파른, 또 상당히 불안정하게 고정된, 사다리를 지나고 나면 배낭을 메고는 통과하기조차 쉽지 않았던 바위터널을 지나야 했습니다. 몸을 쭈그리고 이 곳을 지나려니,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천문이 생각났습니다.

너와 나의 짐
허나,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요?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걸쳐 있는 사다리라는 위기는 산우님들 사이의 배려와 우애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 분들의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떨리는 마음을 추스리신 채 어금니를 악물고 사다리에 오르셨고, 젊은 분들은 나이 드신 분들의 물리적 짐을 덜기 위해 배낭을 대신 둘러메고 사다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짐을 나눠 메고 올라간 Mt. Morgan의 하늘은 Squam Lake을 한아름 담고 있었습니다. 서로 이어진 듯, 또 서로 끊어진 듯 하나됨을 이루고 있는 Squam Lake이야 말로 서로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어도 또 하나 되어 산에 오르는 보스톤산악회 산우님들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요?

노랑, 앞선 자들이 남기고 간 배려
Mt. Morgan에서 새로웠던 것 중의 하나는 노랑이었습니다. 한국의 산과는 다르게 미국의 산에는 사람의 흔적이 많지가 않습니다. 산 입구에 화장실조차 없는 경우도 아주 많구요. Mt. Morgan에는 헷갈리는 길목마다 나무 위에 조그맣게 칠해진 노랑이 있었습니다. 그 방향이 올바른 길이라는 안내도 없지만, 누군가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단 한번의 의심도 없이 노랑을 따라 주저 없이 발길을 돌리는 건 아마도 산악인들만의 이심전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가 남겨놓은 작은 노랑이 뒤에 올 사람들의 나침반이 되듯, 우리네 삶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노랑 하나 남겨두는 건 어떨까요?

허무(虛無)의 의미
종종 어차피 내려올 산을 허무하게 뭣하러 올라가느냐고 냉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산에 오른다는 것은 허무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허무가 허무가 아님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어차피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야 말 허무한 인생이라도 의미 있고 멋진 인생을 기필코 살아내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삶에서 정녕 아름다운 것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 한 방울의 땀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다시 내려올 산일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내딛는 산우님들의 땀방울처럼!

<산행후기/ 보스톤산악회원 박 선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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