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4-03, 12:23:32 
이튿날 아침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가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도서관이 있는 동숭동의 대학본부 건물과 문리대 건물은 미 8군이 주둔하고 있어 모든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대학교 정문 앞에서 혹시 누가 올까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곧 차 주임과 회계 이호고, 서무 이조혁, 수서 남상돈 등이 나왔다. 모두들 피난 갔다가 방금 돌아 왔다는 것이었다. 차주임이 알아 온 바에 의하면 대학본부는 총장공관을 본부의 임시사무처로 사용키로 하고, 도서관은 윤일선 박사님 관사의 응접실을 빌려 사무실로 사용케 되었다는 것이다.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응접실 한 가운데 책상 한개 놓고 둘러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차주임이 대학본부에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6.25때 공산치하에서 계속 근무한 교직원과 사무직원은 모두 부역자로 취급되어 모두 면직되었다는 것이다.

6.25전에는 36명이었던 직원이 부역자와 행방불명자를 제외하고 나니, 차주임, 이호규, 이조혁, 남상돈, 그리고 사서인 나 모두 5명밖에 되지 않았다.

도서관 본 건물은 미국군이 사용하고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고 사무라고 해야 대학본부와 연락을 취하는 일 정도였다. 그래도 출퇴근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전쟁이 언제 끝날는지 모른다.

무료하고 지루한 하루하루였지만 그래도 날마다 정세가 돌아가는 형편을 알아보는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대학은 문을 열지 못한 채 2달이 지났다.

11월을 다 보내고 12월에 들어서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서울대학교 운동장 뒷길로 퇴근하던 어느 날, 본부직원이 국군이 황주에서 후퇴하였다고 하면서 전세가 불리한 것 같다고 전해 주었다. 그래도 무슨 큰일이야 있겠나 하고 별 생각 없었다.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도서관 소사 김 씨가 찾아 왔다. 현관으로 나가 보니 국군장교 한분과 경찰관 한분이 타고 있는 지프차가 서있었다. 김 씨가 말하기를 도서관으로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옷도 단단히 춥지 않게 입고 세면도구도 준비하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저녁시간에 나오라는 것인데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외투도 없던 시절 따뜻하게 있을 옷도 없었고, 소금으로 이를 닦던 시절에 세면도구가 다 무슨 소리인가. 입은 옷 그대로, 어머니께 어디로 간다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채, 지프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장 달려 서울대학교 도서관 서고 뒤에 나를 갖다 내려놓았다.

내려 보니, 미국 트럭 5대와 군인들이 이미 와 있었다. 총장서리 김두헌 박사와 차순영 주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박사가 서명이 적혀 있는 종이쪽지를 건네주시면서 군인들을 데리고 서고에 들어가 규장각의 귀중 도서들을 내다가 차에 실으라고 하셨다. 마침 이조혁, 이호규, 남상돈 등 몇몇 직원들도 왔다. 그러나 귀중도서들이 보관된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 한사람뿐이었다.

군인들을 데리고 서고로 들어가 책을 내오기 시작하였다. 도서관 서고의 맨 아래층 창문은 철망으로 막혀 있어, 2층 창문에 사다리를 걸어 놓고 그 위에 송판을 깐 다음 책을 밀어서 내렸다. <승정원일기> 3047권, <일성록> 2339권, <비변사등록> 273권, <비서원일> 115권 등 10여종 7천여 권을 트럭에 다 싣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다.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 은 들기에도 무겁고 큰 책이라 힘이 많이 들었다. 책을 만재한 5대의 트럭에 각각 한사람씩 타고 서울역 뒤 화물차 터미널로 갔다. 군인들과 함께 화물차 칸에 책을 다 옮겨 싣고 나니 자정이 넘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군인들이 깨소금 주먹밥을 하나씩 주기에, 얼른 받아먹고, 화물칸에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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