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2
보스톤코리아  2015-08-10, 12:04:32 
외교관이 되려고 194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김윤용의 꿈은 이듬해 발발한 6.25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전쟁과 함께 그는 입대를 하였고, 보병학교에서 보병장교로 근무 중 미국의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1958년 귀국하여 박동숙(이화여자대학교 피아노학과)과 결혼하였으며, 그 해 연세대학교에 학사편입하여 동 대학의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4.19 당시에는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부관으로 근무하였고, 5.16 군사정변 이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제대 후 그는 그가 어릴적 부터 꿈꾸었던 외교관이 되었다. 1963년에서 1965년까지 주미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했으며, UN대표 참사관과 제20차 UN총회 한국대표로 활동하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본국으로 불려와 청와대 경호실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하다가 학술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무렵 태권도계로 부터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제의 받았다. 1971년 1월에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맡았다.132) 

이 당시의 태권도계는 양적인 팽창과 함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창기 관館을 창관한 창시자들은 이민, 월북 등으로 실질적인 활동에서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관장직을 물려 받아 관세를 확장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태권도는 철없는 어린아이들도 도장문을 출입하는 시절이었다. 오래전 부터 있어 온 태권도계의 통합 논의는 각 관의 자존심과 명예와 무도인 특유의 상이相異한 이상理想으로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태권도의 경기화/스포츠화에 더 관심을 두고 있던 지도관의 이종우와 청도관의 엄운규가 주축이 되어 태권도계의 통합과 태권도의 경기화를 위하여 그에 적합한 인물인 김운용을 영입하였다. 현대 태권도의 겨루기(자유대련)는 지도관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였다. 일본의 가라데는 겨루기가 없다. '쿠미데' 라는 약속대련이 일을 뿐이다. 이 '겨루기' 가 바로 가라데와 태권도의 가장 큰 차이점이며, 태권도가 가라데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특성화되어 세계적으로 발전되는 결정적인 기술이었다. 

김운용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영입하여 태권도의 경기화를 추진한 이종우의 증언을 보면, "간단해요. 혼자하는 무술은 고달프거든, 상대가 있어야 서로 경쟁력이 생기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기술이 발전하는 겁니다. 다른 도장에서는 '사람 죽는다'고 반대할 때 우리(지도관)가 먼저 겨루기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제시대 부민관이 있던 장소에서 시합을 열었는데, 우리 쪽 아이들이 다 이기다시피 했어요. 다른 도장은 시합을 안했으니까 (우리 아이들이)잘 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중략… 그러다가 다른 도장들도 노상 질 수는 없으니까 겨루기를 적극적으로 시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우리 도장이 맥을 못 추는 신세가 됐어요. …중략… 스포츠 전체로 볼 때 수기手技는 권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족기足技로 발전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경기에서는 주먹을 못쓰게 하고 경기규칙도 발공격 중심으로 만들고… 중략… 어떤 운동이든 스포츠로 발전하려면 뭔가 톡특한 것이 있어야 되요. 말하자면 축구는 발로 차는 거고, 농구는 손으로 던지는게 특징이죠. 그래서 우리는 발 중심으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만일 태권도가 서로 엉겨붙어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경기로 만들었다면 아주 지저분한 싸움이 됐을 거예요." (신동아 2002년 4월호, 육성철 기자 인터뷰)  


132)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은 2013년 별세하여 장군묘역에 묻히길 거부하고 파월병사들과 죽어서도 함께하기 위하여 사병묘역에 안장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참 군인' 채명신을 초대(1962.12.15~1964.4.2) 회장으로 2대(1964.4.3~1965.1.14) 박종태, 3대(1965.1.15~1966.1.29) 최홍희, 4대(1966.1.30~1967.1.29) 노병직, 5-6대(1967.1.30~1971.1.16) 김용채, 7-14대(1971.1.17~1991.1.16) 김운용, 15-16대(1991.1.17~1996.1.25) 최세창, 17-18대(1996.1.26~1998.11.2) 이필곤, 19-20대(1998.11.3~2002.2.4) 김운용, 21대(2002.2.5~2004,1,14) 구천서, 직무대행(2004.1.29~2004.2.26) 이규석, 22-23대(2004.2.27~2008.4.30) 김정길, 24-25대(2008.6.11~2013.2.4) 홍준표, 26대(2013.2.5~현재) 김태환 국회의원이 재임하고 있다. 수 많은 회장들 중에서 참 무도인은 4대 회장 노병직만이고, 3대 최홍희는 자칭 무도인에서 태권도인이 되었고, 가장 오래 역임한 김운용 역시 후일 자타가 공인하는 태권도인이 되었다. 나머지는 시대의 부침에 따라 군인들과 정치인(국회의원)들이 맡았다. 현 김태환 회장은 5.6공의 '킹 메이커' 김윤환의 친동생이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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