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23
보스톤코리아  2009-07-28, 14:31:24 
고구려가 패망한 후 검모잠 장군이 서기670년 4월에 보장왕의 외손자 안순을 옹립하고 고구려를 재흥하려다가 도리어 안순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 무렵 신라가 백제의 옛 영토를 아우른 다음 그 세력을 몰아 옛 고구려의 도성 평양을 향하여 북상한다.

당나라는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서기 676년 만주의 신성(지금의 심양) 으로 옮기고 요동 지방에 거주하는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무마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데려갔던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 도독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냈다.

신당서는 전하기를 “보장왕이 조선군왕에 임명되어 요동으로 가서 말갈족을 데리고 고구려를 재건하려고 모반을 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왕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볼 때 말갈족의 왕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패망한 후 포로가 되어 당나라에 잡혀갔던 보장왕이 요동으로 돌아오자 요동지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인과 말갈족들은 나라를 되찾은 것 같이 기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나라의 즉천무후는 그같은 사정도 헤아리지 못하고 간신배들의 중상모략을 참말로 믿고 보장왕을 소환하여 촉땅의 공주(功州) 로 유배시켰다. 앙주(仰州) 가 아니다.

공주는 지금의 중국 사천성(山西省)의 옛 명칭이었다. 보장왕은 서기 680년 망국의 한을 품고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이후 요동에 있어서의 고구려 세력은 완전히 쇠퇴 되고 말았다. 요서지방 특히 영주로 가 살던 고구려인과 말갈족들은 대조영과 말갈추장 걸사비우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대조영은 인품도 출중하였거니와 40여 세의 장년으로 그 무술과 용병술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신당서 발해전 참조).

고구려가 패망한 지도 어언 30여 년이 되었다. 영주지방에 모여 살던 고구려인과 말갈족들은 나라를 되찾아 조상대대 살아왔던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을 항상 갈망해왔다. 이 때에 글안은 송막도독 이진충(李진完)이 당나라의 영주도독 조문회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대조영은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아버지 걸걸중상을 모시고 말갈 추장과 함께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들을 데리고 요하를 건너 요동의 산악지대로 가서 당나라의 반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대조영의 발해국 건국동기와 그 소속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진충의 반란 부터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글안인은 유목민족이라 일정한 정착지가 없이 물과 초원을 찾아 차마가 가는대로 이동하며 생활했다. 그러니 그들의 이동범위는 열하 지방과 대흥안령 남쪽의 초원지대를 돌아다니며 유목 생활하는것이 고작이었다.

중국사람들은 화이(華夷)의 구분이 엄격했다. 그 구분은 종족적이기 보다 문화적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전 세계의 인류를 중국인, 야만인, 금수의 3종으로 구분하고 그 중 교화가 가장 우수한 것이 중국이라고 자부했다는 것이다(중국철학사, 풍우란 저, p 249).

당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을 중화인이라고 높이 평가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북방민족들을 북적, 서융, 동호, 동이 등으로 비하하여 야만시해왔다.

영주 지방은 한당 이래의 유적지로서 현실정치에 불만을 가진 자나 죄인, 그리고 소외된 천민과 북방민족들이 잡거 하였던 곳이다. 그러므로 기회만 보이면 언제든지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날 기운이 팽배해 있었다. 이 영주지방에는 글안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어서 그 세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서기 696년 5월에 글안의 송막도독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만리장성의 북쪽에 웅거하던 돌궐이 반란을 일으켰고 서쪽의 토번(서장족)이 또한 일어났다. 이 같은 긴발한 상황에 동쪽에서는 대조영과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당나라에 반항하여 거사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당황하여 그 회유책으로 말갈추장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고 걸걸중상은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하여 그 죄를 사한다고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즉천무후의 책봉을 거절하고 계속 항쟁했다. 걸사비우가 즉천무후의 회유책을 물리친 것은 서기 668년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고구려의 북부욕살 (도독과같음) 고연수 장군과 남부욕살 고혜진 장군이 고구려군과 말갈병을 합하여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도우려 왔다가 당나라 군사에게 참패를 당하고 고연수와 고혜진 두 장군은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당나라의 이적장군이 말갈병 3천2백 명을 잡아서 함정을 파고 묻어 죽였다. 걸사비우는 그 때의 참상을 잊지 못하고 그 원한으로 즉천무후의 회유책을 거부하고 끝까지 대항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든 글 안의 이진충은 당나라의 영주도독 조문회를 살해하고 영주를 함락한 다음 스스로 상가한(上可汗;왕을 뜻함)이라 자칭하고 매부 손만영(孫萬榮)을 대장으로 삼아 요서일대의 중국인의 거점을 총 공격했다. 글안인들은 평시에는 부족별로 분산하여 유목생활을 하다가도 일단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면 총 동원하여 전투에 임한다. 이 때 이진충이 모은 군사가 10여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무서운 세력이 아닐 수 없다.

이진충은 그 세를 몰아 승주(崇州)를 공략하고 부사 허흠적(許欽寂)을 잡아 죽였다. 이 보고를 받은 당나라의 즉천무후는 크게 노하여 곧 응양장군 조인사(曹仁師)와 금오위 대장군 장현우(張玄遇) 그리고 사농소경 마인절(麻仁節)을 파견하여 이진충을 치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는 황장곡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장현우와 마인절 그리고 많은 장수들이 포로 또는 전사했다.

이에 놀란 즉천무후는 우무위 대장군 무유이를 청변도 대총관에 임명하고 천하의 용사를 불러 모아 글안군을 치게 했다. 그러나 무유이 장군도 글안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청변도 부총관 장구절(長九節)이 수백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글안군의 전후를 강타했다. 이 싸움에서 이진충이 살해되고 손만영영은 산으로 도망하여 겨우 그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신당서는 이진충이 살해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우무위 대장군 무유이가 개선했다. 즉천무후는 이진충을 살해했다는 보고를 받고 기뻐하면서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어 신공(神功) 이라고 개정했다. 이로 보건데 이진충의 반란이 얼마나 심각했던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진충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은 단지 영주도독 조문회가 방약무도하게 글안인을 압박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의 전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원에 입성하는 것이 최후의 목표이었던 것 같다.

한편 산으로 도망했던 이진충의 매부 손만영 장군이 하산하여 사방에 흩어졌던 글안병들을 다시 수습하고, 별장 이해고와 노무정 그리고 하가소를 선봉장으로 하여 기주(冀州)를 공격, 자사육보적 (陸寶積)을 살해하고 수천명의 중국인을 약탈했다. 이후로 손만영은 이진충을 대신하여 글안인을 총 지휘한다.

손만영은 글안병의 대오를 정비, 만리 장성을 넘어 유주(지금의 북경)로 진격해 갔다. 이에 놀란 즉천무후는 하관상서 (군부대신) 왕효걸(王孝傑) 과 우림대장군 소광휘에게 군사 17만명을 주어 글안의 손만영을 치게 했다.
그러나 왕효걸의 당나라 군사는 동협석의 전투에서 손만영의 글안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대총관 왕효걸과 많은 장병들이 전사 했다.

손만영의 글안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유주를 습격하고 낙양을 목표로 태원으로 향했다. 즉천무후는 상황이 위급하게되자 금오위 대장군 무이종을 신병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 뉴사덕을 청병도 대총관으로 임명 군사 20만으로 글안의 손만영을 치게 했다. 이 때 당나라의 신병도 총관 앙현기(楊玄基)가 특공대를 복병시켰다가 손만영의 글안군이 진격해 올 때 그 선후를 가로 막고 집중공격하자 글안군은 여기서 참패를 당한다. 그리하여 별장 하라소는 포로가 되고 이해고와 노무정은 손을 들고 나와 항복했다.

참패를 당한 글안의 손만영은 부하인 노복 한사람만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노하의 동쪽까지 달려왔다. 큰 나무 아래 안장을 풀고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든 사이에 부하 노복이 손만영의 목을 잘라 청변도 부총관 장구절에게 가져다 바쳤다. 이리하여 이진충과 손만영이 일으킨 글안의 반란은 3년여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동북쪽에서 고구려의 걸걸중상과 말갈 추장 걸사비우가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즉천무후는 그 회유책으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왕으로 책봉하고 큰 죄를 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즉천무후의 책봉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항쟁했던 것이다.

즉천무후는 곧 귀순하여 온 글안인의 별장 이해고의 무술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좌옥금 대장군에 임명하고 별장 노무정도 우무위 장군으로 임명하여 고구려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치게 하였다. 글안군의 별장이었던 이해고는 그 무술이 출중하여 이진충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진충이 전사하고 그 후임인 손만영을 도와 힘껏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영도자 손만영은 도주하였다가 노복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해고는 더 이상 대항할 능력이 없어 당나라에 귀순하였다.

즉천무후는 이해고의 무술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옥검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글안군의 잔당을 토벌케 하고 나아가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치게 했다. 이해고는 글안군과 해군(奚軍;몽고병) 3만명을 이끌고 먼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그를 참살했다. 아마도 이 때에 대조영도 이해고 에게 크게 당했던 것 같다. 말갈족을 이끌던 걸사비우가 전사했다.

말갈족은 본래 숙신족이라 하여 송화강의 북쪽과 연해주 일대에 군거하던 수렵민족이다. 그들은 수렵과 빈약한 농경으로 그 생활 기초가 아주 열악했다. 그 생산성은 서북의 유목민족들 보다도 오히려 영세하여 국가를 일으켜 발전시킬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서기 1114년 완안부 (지금의 할빈 근처에 살던 여진인)의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기까지 오래인 역사 동안 고구려와 발해에 얹혀 살던 민족이다. 그런데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이제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들은 대조영에게 의지하여 그 지시에 따라 행동 할수 밖에 없게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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