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들에겐‘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보스톤코리아  2010-07-05, 14:14:38 
6.25 전쟁 60 주년 되는 지난 25일, 6.25 전쟁 당시 전장을 누비던 참전용사들이 메드포드에 위치한 청기와 식당에 모여 ‘잊을 수 없는 6.25 전쟁 과 모국사랑’이라는 주제로 6.25 전쟁 당시 체험들을 토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날 자리한 참전용사들은 강경신 6.25참전유공자회장을 비롯 최창섭, 김경모 , 서정섭 , 박기식, 김원엽 , 최덕중 씨 7명입니다.
다음은 참전용사들의 대담 내용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지면 관계상 전체를 싣지 못하고 일부 간추렸음을 양해 바랍니다. <편집자 주>

김경모 참전용사
 나는 해병대 6기생이다. 평양에서 살다가 49년12월에 월남,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6.25가 터지고 중공군 100만 명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에 이승만 정권이 젊은 사람들을 모두 남하시켰다.
그때 진해로 가서 해병대에 입대, 1개월 훈련을 받고 강원도 인제 도설산 전투에 동기생 300명과 함께 투입 됐다. 유엔군 부대하고 교체하여 홍천에서 3개월 훈련을 받고 924고지라는 곳으로 배치됐다. 그곳은 육군 3사단이 전멸한 곳이다.
해병대는 미 해병대하고 작전을 하기 때문에 일개 분대가 12명이고 전투력이 좋았다. 924고지에서 한달 5일 점령 명령을 받았지만 5일만에 완전점령을 했다.
이곳에서 파편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 야전 병원에서 5일 치료를 받고 후방 진해로 내려와서 굽었던 다리를 더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후유증이 있다.
휴전 2년 후에 제대하고 살다가 미국에 이민 왔다. 미국은 자유롭고 좋은데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은 눈물로 기도 하는 것뿐이다.



최창섭 참전용사
 인민군이 논산까지 왔을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전쟁을 경험했고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팔공산에 올라 가기로 한 작전을 대기하던 중, 지급되는 총과 실탄 3개를 받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대전까지 갔을 때 몇몇이 함께 도망하여 강경에 숨어서 있다가 유엔군에게 자수를 하였다. 그때부터 지방 빨갱이와 인민군 토벌을 위한 경찰에 지원, 약6개월 지리산 토벌에 나가 전쟁을 경험했고 그 후 경찰에서 나와 군에 정식 입대하여 위생병으로 근무했다. 미국에서는 교회에 다니며 한국이 하나님 은혜로 살아야 된다 라는 생각으로 헌금과 기도로 나라사랑을 표하고 있다.

강경신 6.25참전유공자회장
당시 나는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전쟁 나고 2-3일 후 모두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애국가를 가르치다가 한 여선생으로부터 야단맞고 숨어 다녔다. 그러다가 미 군대를 만나 지원 입대하여 카추샤가 되었고, 그 후 전장에 나가 전쟁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은 절대로 다시 일어 나서는 안될 것을 안다.



서정섭 참전용사
 병참 특별부대 소속 1101건설공병대에 배치되어 부천에 주둔하고 있다가 6.25전쟁이 발발, 1950년6월27일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에 집결 명령을 받고 와서 특공대원으로 선발되었다. 12명의 대원이 트럭을 타고 계속 남하하여 경북 의성까지 갔다. 그곳의 인민군이 먼저 주둔한 골짜기에서 밤새 총을 쏘고 난 후 머리를 더듬어 가며 육탄전을 벌였다 그 전투에서 가는 귀를 먹었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제 86이 넘은 내가 무엇을 할 힘도 할 수도 없다. 마음으로 한국이 잘되기만 기원한다.



박기식 참전용사

 6.25때 나는 대구남산학교 선생을 했다. 그때 북쪽 인민군들이 일사천리로 낙동강전선까지 내려왔다. 그래서 우리선생들도 군에 지원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곡사포 포병부대로 훈련을 마치고 103포대에서 전방으로 갔다. 그때는 원통리 근처가 혈전이 벌어진 곳이다. 전투 중 부상을 당한 나는 후방으로 후송되고 그후 2년여 근무하다가 나와서 다시 선생으로 일했다. 그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에 이민 왔다.
미국에 사는 우리와 국내 동포는 상당히 균형이 안 맞는다. 토네이도 속에 휘말리면 운신의 폭이 없는 것처럼 역사적인 회오리에서는 개인의 운신의 폭이 없다. 역사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보자. 남과 북은 싸워서 통일 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죽는다. 평화를 말하고 평화통일을 말하자.



김원엽 참전용사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책은 한국의 5000년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 보자는 내용이다. 나는 “뜻으로 본 6.25의 교훈”이러한 내용으로 말하고자 한다.
6.25 당시 북쪽에서 내려올 때 내세운 구호가 적화통일이고 남쪽은 유엔군의 힘으로 북진 통일을 꿈꾸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까지도 성공하여 북진을 할 때에 그 여세를 몰아 가지고 중공 만주까지도 폭격을 하려고 했었지만 좌절되고 오히려 파직을 당했다 .그러면 거기서 얻은 결과는 무언가? 적화통일도 아니고 북진통일도 아니다.
그러면 앞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으로 보는 6.25는 결말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이 평화적인 통일로서 모아져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북이 고향이다. 6.25가 터져 3개월 동안 창동이라는 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도토리를 줍고 밤에는 교회가족을 만나고 하면서 9.28을 맞이했다. 9.28을 맞이하면서 전세(戰勢)를 보니까 상당한 수의 유엔군들이 동상자까지 나올 정도로 희생을 하고 있었다. 월남한 젊은이가 평안히 가족과 더불어 지낼 수만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 자진하여 들어 간 곳이 육군종합학교였다.

육군종합학교는 사관학교가 그 당시 없어 진 때문에 2달 동안 훈련을 해서 일선에 내 보내는 거였다. 50년12월 3일 육군종합학교 17기에 입영을 해서 51년2월 4일 소위로 임관이 되고 7사단에 배속이 되었다. 인사참모에게 신고를 하니 인사 장교의 말이 너희는 “소모 소위다”라는 것을 각오하고서 나가야 된다 라는 것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7사단 병력이 몽땅 포위를 당했던 상황에서 인해전술에 눌려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에 의해 교환됐다.

나는 북한을 고약하게 생각지만 두 가지로 봐야 한다. 독재정권을 쥔 김일성과 김정일은 적으로 생각하지만, 그 밖의 무수한 동포들은 우리의 가까운 친척들과 마찬가지인 동포들이다. 그 사람들은 비교해서 말하자면 우리 남쪽은 비단 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은 무명 옷을 아직도 입고 있는 아주 소박한 아주 순수한 그러한 사람들이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 는 말처럼 요즈음 남북의 갈등관계는 당연하지만 남남 간의 갈등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되는데, 육군사관학교학생들까지도 주적이 어디냐 하면 북쪽이 아니라 미국이라는말로 대답하는 상황까지 놓여 있다.
앞으로 만약 제2의6.25가 터졌을 때는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내가 6.25때 24살이었는데 지금 우리 남한의 30세 전후 되는 젊은이들이 제2의 6.25가 터졌을 때는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책 가운데 목민심서가 있는데 그 책이 얼마나 백성들을 위한 유명한 책이냐 하면 월남 호지명 씨가 전선에 나가면서도 지고 다니면서 애독했다는 책이다. 그런 훌륭한 성서들이 있는데 우리는 나라 꼴이 어떻게 되다 보니까 남남끼리도 갈등을 빚어내는 상황이라 정말 한탄스럽기 그지 없다.
그렇게 되기까지는그들이 잘못이 아니라 그 윗대의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재 이명박 대통령까지 민족을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정권이 과연 있었는가 생각할 때 나는 없었다고 본다 .
그 때에 생각한 것은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김구 선생을 암살하는 직접 명령하지는 않았겠지만 포병장교 안두형인가를 시켜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을 돌아가시게 했다.

여운형 선생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어떤 책에서 의하면 여운형 선생이 좌익으로 몰리게 된 것은 그 당시 일제시대에 조국을 생각하는 것이 좌익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별로 민족주의 사람들이 없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까 이 분이 접촉한 것이 좌익들하고 주로 교제하다 보니 좌익으로 몰리게 된 입장이었다는 것을 어떤 기록에서 보아서 알았다.

여운형 선생은 혜화동 로타리 지서 근처에 있는 골목에서 피습을 당해서다. 나라 꼴이 그런 정도다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근본부터 뿌리를 뽑아 고쳐 나가야 한다. 발본 쇄신해야 한다.
성경 잠언 4장 27절 말씀에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정치인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바로 잡으면 좋겠다.
나는 6.25 참전 유공자라는 명예를 상당히 존중한다. 요전에 이 지역에서도 대통령 표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받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6.25참전국가 유공자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



최덕중 참전용사
 17살 때 6.25가 났는데 징집은 면했다. 그러나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군번은 없지만 학도병으로 종군을 했다.
울진 매봉산 전투와 인제 전투에서 전쟁 경험을 하고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미 고문단 헌병대에 소속되어 약 1년을, 그리고 7.28헌병대, 5.19헌병대에서 근무하다가 수복이 되어 나왔다.
나도 6.25때 참전을 했고 전쟁을 경험해서 다시는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첫째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력이나 국방력이 북한을 능가 하는 줄 알았다. 작년에 어느 세미나에서 들었는데 우리나라 국방력이 북한에 뒤진다. 육군은 더 할 것도 없고 좀 나은 것이 공군이다라는것이다. 그래서 그 때 느꼈다. 우리가 강한 줄만 알던 것이 잘못이구나 하고.

우리나라 국방비가 GDP 국민 생산량의 2.5%인데 그 중에 70%가 행정비로, 먹이고 입히고 월급 지급액이란다. 나머지 30%로 어떻게 국방 개혁을 할 것인지, 아무 것도 못하는 거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정책적인 것이지만 사대강, 세종시하며 싸우는데, 나는 이보다 급한게 국방이 아닌가 한다.
한국의 국방력을 보자. 국방의 기준을 보면 육해공군의 비율이 8:1:1이란다. 미국은 육해공군비율2:1:1, 공군과 해군에 상당히 많이 투자를 한다. 이런 문제를 정책하는 사람들이 싸우지만 말고 생각 좀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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