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독도를 포기 못하는 이유
보스톤코리아  2011-04-25, 13:59:38 
일본은 지금 쓰나미 사태로 천재지변으로 50만 유동 인구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등으로 쑥대밭인데 그 와중에 또다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자기네 땅인데 한국이 점령하고 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나 차세대까지 계산한 100년 앞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방향으로 중국과 일본의 도서 분쟁, 러시아와 일본의 도서 분쟁 사례를 대처하는 일본의 태도를 살펴 볼까 합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전 국민이 일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6년간의 치욕적인 지배를 받고도, 그 악랄한 만행을 당하고도 겉모습만 알지 속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한 예가 쓰나미 사태에 200억 원 지원금을 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맞는 말씀인데 그건 어리숙한 점이 많은 한국사람의 생각이지 받을 건 받고 따질 건 따지고 하는 냉정한 일본인의 사고 방식은 아니라는 점이죠.

그 좋은 예를 구한 말 한일 합방에서 찾아 보겠습니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 전에 일본은 1905년 일러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포츠머스(Ports Mouth) 평화조약을 맺고 한국 병탐 국제적 묵인(러시아, 미국)을 받습니다. 조약문 2항에 “러시아 황제는 일본 황제에게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우선권을 준다”고 써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걸 알고 3일 동안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당사자인 한국과 사전의논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해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깔보고 무시했고 그만큼 초라하고 힘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놓고 너희들 내 하는 일에 간섭마라 못박아 놓고 1910월 8월 밤 매국노 이완용 이하 몇 졸개들 앉혀 놓고 통째로 한국을 먹어 치운 겁니다. 이것이 일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은 장기간 준비, 계획 세워놓고 차근차근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일을 하는데 한국은 일이 터지면 요란한데 그 끝이 흐리멍텅해서 늘 당하고만 살고 있습니다. 김은한 박사는 일본과 외교 전에서 승리한 건 위안부 사건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맞아요.

지금 독도문제도 비슷한 흐름이라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이 한국을 더 잘 알고 있는듯한 생각이 듭니다. 현재 일본은 국제 사법재판소에 판사10명 중 1명을 일본인으로 막아놓고 매년 엄청난 액수의 지원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소로 가져갑니까? 그건 우리 스스로 우리땅을 분쟁지역이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기 가면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결과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정부 대처하고 있습니까? 이게 문제예요. 다시 말해서 팔다리 다 잘라 놓고 알몸일 때 먹어 치우는 수법, 이것이 일본인의 진짜 모습임을 알 때가 됐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흥분하지 마시고 차분히 준비하고 계획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갑시다. 역사는 바로 잡거나 기억되지 않으면 되풀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일본은 중국, 러시와의 도서 분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 봅시다.
Senkaku 해양 영유권 분쟁과 중.일 관계 (독도문제 해결책)
지난번 말씀 드린 대로 먼저 중, 일관계를 살펴볼까 합니다. 지도를 보면 센카우열도는 중국에 가깝고 일본에는 먼 것 같지만 두 나라가 포기 못하는 이유 2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지정학적 이유 입니다.
일본이 수출, 수입하는 통로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죠. 여기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길목입니다.

둘째는 석유 매장량입니다.Norway의 석유회사 직원 안오라즈 위람스 가MIT대학을 통해 밝혀낸 매장량이 40억톤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해저 석유 매장량의 반정도의 엄청난 양 입니다. 이것을 알아낸 중국이 1970년 9월 영유권을 공식 주장했고 일본은 공식 발표 없이 부인한 것입니다.

1972년 주은례와 다나까 수상과의 중, 일 당국의 평화 수호조약으로 거론치 않기로 했으나 1973년 남사군토에서 필리핀 해군과 중국이무력 충돌하면서 강한 의지를 표시했습니다. 1978년 중국 저인망어선단이 조어도에서 조업하자 일본 해상 보안청이 퇴거 명령을 내렸으며 1979년 1월 중국과 국교를 연 일본은 어업 자원조사를 했고 1990년 9월 조어도에 등대를 설치하고 항도 표시로서 정식 승인했습니다.

이에 맞춰 중국은 군함과 폭격기를 동원, 초긴장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그 사이 20여 차례 충돌이 있었고(1999년) 이것은 의지의 정도, 국력 차의 위협인식의 강도에 따라 분쟁의 강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등소평이 집권하면서 이념보다는 경제 실리를 챙기자며 일본의 도움이 필요해서 잠시 조용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포기한 건 아닙니다. 그러면 일본은 어떠한 전략으로 대처했는지 살펴볼까요.

1. 중국과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유지로 변경한 것
2. 이열도를 군 사격장으로 미국에 제공하여 환심을 사고
3. 오까나와 반환 협정과 더불어 돌려받는 방법으로 국제 공인화를 시도했고
4. 중국과 대만간의 대립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에게 자국의 입장을 주입시키는 일관된 노력, 즉 현상 고착화 전략을 하고 있음. 이 전략을 거꾸로 뒤집어 독도에 충분히 적용, 사용할 수 있고 하고 있음을 짐작 하시겠습니까?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 지지 않았던 이승만 자유당 정권, 장면, 5.16혁명 등 그 파도를 교묘히 이용한 일본입니다.
편화선으로부터 시작해서 독도 문제를 울릉도와 분리해서 분쟁지역으로 몰아간 점, 그래서 국제 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점 등 그들의 특징인 치밀, 교묘한 술책 준비, 국제적 P.R등 하나도 벗어난 점이 없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답답합니다. 전술은 바뀌더라도 정책은 정권 교체 상관없이 일사 불란 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독도는 한국 침탈 시 맨 처음 점령한 한국 땅이고 이 독도에서 소련 함대 이동을 알아내 소련 함대를 격파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독도 밑에 있는 액체GAS매장량을 포기할 수 없기에 일본은 독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쓰는 방법 그대로 우리고 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 사회에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독도는 일본인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서일
(뉴햄프셔한인회장,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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