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일본상인 탐구
보스톤코리아  2012-03-26, 14:02:54 
제7회 오하라 여자의 콩떡 한 개
교토에는 <오하라메>라는 유명한 콩떡이 있다.
찹쌀에 검은 콩을 꾹꾹 눌러박은 볼품없는 떡이다. 값도 아주 싼 동전 한잎의 싸구려 떡이다.헌데 이 볼품없는 떡은 교토의 명물 중의 하나이다.

오하라메.<오하라의 여자>라는 뜻이다.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인근에 오하라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하늘이 동전만하게 보이는 산촌이다. 논과 밭이 거의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어서 도무지 먹고 살 길이 없는 곳이다. 그 오하라 마을 여자들은 생계를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자르고 패서 한단의 나무를 만든다.그리고 한단의 나무를 머리에 이고 교토로 간다.

오하라와 교토는 차로 한시간 거리이다. 그러나 머리에 한단의 나무를 이고 걷자면 서너시간이 걸려야 교토에 닿을 수있다.아침에 죽 한그릇을 떠먹고 오전 내내 걸어 그녀들은 교토에 도착한다. 그리고 교토의 니시키 시장을 찾아 거기서 한단의 나무를 판다. 나무 한단이라야 요즘 돈으로 불과 5천원.

그녀들은 그 5천원의 돈으로 보리 한홉을 사서 다시 오하라로 돌아간다. 오후 내내 걸어야 해가 질 때쯤이면 오하라에 도착할 수 있다. 오하라 마을엔 그녀의 어린 자식들이 어머니가 돌아올 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의 보리한홉이 있어야 그날 저녁을 먹을 수있기 때문이다. 오하라의 여자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한다.그러나 보리죽 한그릇을 먹고 점심을 건너뛴 그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오하라로 나가는 교토의 데마치 야나기 거리에 다와라야깃토미(俵屋吉富)라는 떡집이 있다. 그 좌판에는 먹음직스러운 콩떡이 있다. 오하라의 여자는 망설이고 망설이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도저히 오하라까지 걸어갈 기운이 없다.

눈앞에 자식들의 얼굴이 어른거리지만, 그거라도 한 개 사먹지 않으면 기진맥진해서 도저히 집에 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떡 한상자는 열 개. 한상자를 다 살수는 없다.
결국 그녀는 콩떡을 하나만 팔 수없냐고 물어본다. 주인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옷차림은 거지나 진배없이 더럽고, 게다가 장작을 머리에 이고 오느라고 땀냄새는 진동을 한다. 떡집 주인은 행색이 너무나 초라한 그녀들에게 떡을 팔고 싶은 마음조차 없다. 처음에 떡장수는 그녀들에게 떡을 팔지 않았다. 행색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녀들이 오하라 마을의 나뭇단 장수인 것을 알게되었다.

비로소 그녀들이 내민 동전 한푼이 얼마나 힘들게 번 것인가를 눈치챈 것이다. 떡집 주인의 고개가 숙여진다. 한잎의 동전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천금보다 더 소중한 돈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떡집 주인은 오하라여자들이 사먹는 콩떡을 좀 더크고 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낱개도 판매>라고 써 붙였다.
비록 단 한 개의 떡을 팔아주는 고객이지만 그들을 업수히 여겼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이것이 그 유명한 <오하라메> 콩떡의 사연이다.

<하찮은 액수의 손님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라.그들의 동전 한잎이 얼마나 힘들게 번 것인가를 생각하라. 손님을 차별하지 하라.오늘 돈이 없다고 해서 내일도 돈이 없다는 보장이 있는가.>
일본의 상인들은 그런 사실을 오하라메의 나뭇단 장수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오늘날 오하라메라는 콩떡은 교토의 명물이 되었지만,그 콩떡 속에 숨어있는 사연을 일본 과자장인들은 알고 있기에 일본의 과자가게에서는 단 한 개의 과자를 사는 고객이라도 정성껏 그 한 개의 과자를 포장해준다. 오하라 여자들의 콩떡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교토에서는 해마다 5월 셋째주에는 <오하라메 마쓰리>라는 것을 한다.오하라의 나뭇단장수처럼 나무한단과 깡총한 하오리 옷을 입고 바로 그 오하라 여자들이 걷던 길을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걸어보는 축제이다. 참가비는 2천엔. 그 옛날,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공부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하던 어머니들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어떤가. 으리뻑적한 대형백화점이 즐비하고 해외의 명품브랜드가 넘친다. 그걸 사려고 줄을 서고있다. 동전 한잎의 소중함이 잊혀지고, 강남의 골목에는 밤마다 음식점의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이다.
그러나 잊지마라. 대형 백화점과 불야성의 식당들 뒤에서 바로 우리의 어머니, 재래시장 상인들은 그 동전을 벌기위해 새벽부터 나와있다는 것을,그리고 그들은 지금 사는게 너무 힘들어 울고있다는 것을.

제8회나쁜 물건을 팔려면 가게문을 닫아라
교토에는 해마다 약 5천7백만 명의 관광객이 들이 닥친다. 관광객들이 반드시 가는 명소 중에 기요미즈 데라(淸水寺)가 있다.
서기 778년에 창건한 기요미즈 데라 언덕길 주변에는 수백 년 된 부채 가게, 떡 가게, 반찬 가게 등이 모여 노포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바로 이 언덕길의 중심 모퉁이에 시치미야(七味家)라는 양념가게가 있다. 서기 1655년에 개업한 노포이다.

시치미야는 이름 그대로 일곱 가지의 양념을 파는 가게인데, 오늘날 일본에서 양념을 파는 가게 중에서는 바로 이 시치미야(七味家)를 최고로 친다.
가게 입구에 들어서니 여종업원이 차를 한잔 내왔다. 교토는 예로부터 녹차가 유명하므로 당연히 녹차를 내온 걸로 생각했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녹차가 아니었다. 고춧가루와 산초, 후추, 갈은 참깨 등 일곱 가지 양념으로 만든 양념 차였다. 약간 매콤했으나, 그런대로 맛있었고 발상이 일본의 관록 있는 노포다웠다.

잠시 후 가게의 점장이자 시치미야의 부사장인 후쿠시마 요시노리(福島良典.36)씨가 나왔다. 자신은 시치미야의 부사장으로 15대 째이며, 부친이 사장으로 있다고 했다. 손님이 많다고 했더니 2월의 경우 하루에 약 1천 명 정도의 관광객이 들이닥치는데 고객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대만인, 홍콩인 외에 한국 사람도 많다고 한다.아닌게 아니라 손님들 중에 한국 아줌마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도 들린다.
일본인도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양념을 쓴다. 재료에는 고춧가루, 참깨, 흑깨, 후추, 산초, 차조기잎, 생강, 고추냉이(와사비), 겨자 등이 있다.

본래 칠미(七味) 즉, 일곱 가지 양념은 빨간 고추, 생강, 진피, 산초, 검은 깨, 차조기, 대마열매 등이었다. 요즘은 일곱 가지의 양념이 몇 가지 더 늘어났지만, 그래도 그 일곱가지가 일본 양념의 기본이 된다.
그중에서 으뜸은 고춧가루이다. 일본인은 고춧가루를 안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일본에서도 우동이나 메밀국수 등을 먹을 때 고춧가루를 뿌려서 먹는 사람이 많다.

개업 당시 시치미야는 매운 고춧가루를 넣은 차를 팔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치미야 바로 위에 있는 기요미즈 데라(청수사 절)는 일 년 내내 참배객이나 수행자 혹은 스님 등으로 붐볐다. 청수사의 참배객들은 먼 거리에서부터 걸어왔으므로 당연히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들에게 7가지의 양념을 넣은 신자탕(辛子湯)이라는 차를 만들어 판 것이다. 몸이 피곤할 때 녹차에 고춧가루를 풀어서 마시자 사람들은 이마에 땀이 솟고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을 느꼈다.

고춧가루 차가 잘 팔리자 후추 등 양념도 팔기 시작했는데, 후추는 기요미즈 데라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밥과 함께 먹었던 식료품이었다. 후추가 심장병 치료의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이후 시치미야는 신자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오사카와 교토를 대표하는 관서지방의 요리에 자신들이 만든 7가지 양념이 들어가게 하므로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시치미야의 양념이 음식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걸 넣으면 음식이 더욱 맛있어 지기 때문이다.

이후 350년간 시치미야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들만의 남다른 노력 때문이었다.
시치미야는 교토 인근에 직영 농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작은 농장 만을 가지고는 7가지 양념의 공급이 어려워졌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최근 교토 지방의 땅값이 상승하면서 양념 재배농가들이 속속 문을 닫자 새로운 공급선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

고추의 경우는 일본 중북부 내륙 지방인 후쿠이 현의 농가와 계약재배를 하고 있고, 후추와 검은 깨의 경우는 아예 원산지인 브라질과 계약을 맺어 공급받고 있다.
시치미야의 계약원칙은 단 하나이다. <최상의 품질이 아니면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시치미야가 일방적으로 재배 농가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도 끊임없이 좋은 종자를 찾아내어 그걸 개량해서 농가에 보급한다. 그리고 양념 본래의 맛을 내기 위해 첨가물은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1970년, 태풍으로 인해 직영 농장의 양념 작황이 좋지 않자 고객에게 나쁜 물건을 팔 수 없다고 하여 4개월간 문을 닫은 적도 있다.

또 지난 350년간, 3번이나 1년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있다. 그 모두 양념작황이 좋지 않아 나쁜 물건을 손님에게 팔 수없기 때문이었다.
“나쁜 물건을 팔려면, 가게 문을 닫겠다.”,
“우리 가게를 한번 찾아주신 손님과는 앞으로 백년간 거래하겠다.”
후쿠시마 요시노리 사장의 말이다. 시치미야의 목숨을 걸고 좋은 품질의 양념을 판매, 최소한 앞으로 100년간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과연 300년 노포, 시치미야의 고객에 대한 신용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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