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3-25, 15:24:29 
마침 동생이 읽던 <대일본 문학전집> 18권이 있어 갖고 들어가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숨어서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이 되니 오금이 저려 오고, 팔다리가 아프고 목뼈가 굳는 것 같아 견디기가 힘들었다. 사실 나는 숙청될 만한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폭정이 싫어서 남하한 반동이 아닌가! 그리고 하급공무원이었기는 하나 대한민국에 충성한 자이다. 그보다도 더 두려웠던 것은 소련이 주장한 조선 신탁통치 5개년 개혁안에 반대하는 데모에 앞장섰던 과거도 있다. 공산당에게서 용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8.15해방 후 고향 평북 선천에서 인민위원회와 보안대의 폭정, 민청아이들의 만행을 경험했다. 만일 북한 공산군이 승리하여 이 나라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다면 나는 과연 무사할 것인가? 마루 밑에서 별별 생각을 하곤 하였다.

낮에는 다다미방 밑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앞들 배추밭에 나와 몸을 푼다고 체조를 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해 비쩍 마른 몸에다 얼굴은 햇빛을 못 보아 창백하고 머리는 오래 깎지를 못한 장발이라 체조하는 모습은 마치 유령이 흐느적거리는 형상이었을 것이다. 8월과 9월의 달밤은 밝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 그리도 쓸쓸하고 슬펐는지! 더구나 피골이 상접한 인간이 달밤에 체조를 한답시고 들썩 들썩 춤을 추니 그 형체가 허깨비 같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그때의 고생이 너무나 처절하고 슬퍼서 지금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래도 별이 총총한 밤하늘은 보석을 깔아 놓은 것 같아 참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별들은 무슨 소식이라도 전해 주는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연일 밤이 되면 유엔군 폭격기가 날아와 종로, 을지로, 명동 할 것 없이 폭격을 해댔다. 멀리 을지로 6가와 신당동 쪽은 화광이 충천하여 대낮과 같이 밝기도 하였다. 서울이 온통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가 싶었다. 그런데도 걱정 되거나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폭격기가 빨리 와 주었으면 하고 기다려졌다. 하루라도 빨리 국군이 승리하여 감옥보다 더한 고통의 생활에서 해방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유엔군 폭격기를 외가 비행기라고 했다. 웃기는 일이지만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유럽의 오스트리아국 출신인데도 오스트랄리아 즉 호주로 잘 못 알고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어쨌든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9월 28일 수도를 탈환하여 수복까지 3개월간을 견디어 냈다. 나는 그때 당한 심한 고통으로 폐결핵을 얻었다. 1957년 미네소타 대학에 유학가려고 비자를 받기 위해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결핵초기라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으라는 것이다. 허지만 나는 병원도 가지도 않고 약도 먹지 않았다. 죽을 운명이면 죽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생병원 담담의사인 루가 서울대학교에 나의 병에 관하여 통보한 것이었다. 당시 윤일선 서울대학교 총장이 나에게 미국 가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 전화로 물으시기에 단념하겠다고 말씀드린 적도 있었다.

드디어 9월 28일 아침이 왔다. 유엔군 병사들이 돈암동 전차 종점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 주기에 급히 옷을 주어 입고 전차종점으로 뛰어 나갔다. 많은 시민들이 길 양편에서 박수를 치며 이들을 환영하는 것이다. 나도 그들 틈에 끼여 만세를 불렀다. 그날 오후에 미아리에 사는 도서관 회계 주임 차순영 씨 집에 찾아 갔다. 차주임은 선린상업 출신으로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차주임도 용케 피하여 살아 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반갑고 다행스러워 서로 붙들고 한동안 말을 못했다. 차주임은 장작을 쌍아 놓고 그 뒤에 숨어 지냈다는 것이다. 차 주임은 아직도 미아리 쪽은 위험하니 다시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입성을 했다고 하지만 미아리 고개 너머는 아직 평온치가 않았다. 당시 북아현동 국민학교 교장을 하던 어머니 친정 조카는 북아현동의 집으로 가려고 미아리를 돌아가는 길을 나섰다가 후퇴하는 인민군에 살해되었다. 시체를 찾으려고 가보니 미아리 길거리에 수십 구의 시신이 널려져 있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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